가을이 오자 간송의 문은 활짝 열렸다. 이젠 익숙한 풍경이 되어버린 자발적 기다림. 1시간은 기본이고, 주말에는 3시간 씩 줄을 서더라도 기어코 옛그림을 보겠다는 관람객들의 열기로 서울 성북동 간송미술관은 뜨겁게 달궈지고 있다.

봄과 가을, 1년에 두 번 딱 2주씩만 열리는 간송미술관의 옛이름이 ‘보화각’이니 이름 그대로 보배들인 우리 문화유산을 올곧게 지켜온 그곳은 어느덧 한국미술사의 성지가 되었다.

나를 간송으로 이끈 멘토는 고(故) 오주석 선생이다. 아니, 정확히 말하면 그의 책이었다. ‘한국의 미 특강’, ‘옛그림 읽기의 즐거움’, ‘그림 속에 노닐다’ 등 그의 뛰어난 문장력에 의해 재해석된 옛그림의 가치는 고단한 삶을 위로한 청량제였다.

이번 간송의 ‘풍속인물화대전’의 백미인 혜원 신윤복의 ‘미인도’나 ‘월하정인도’ 등 ‘혜원전신첩’에 실린 대표작들에 대한 그의 탁월한 해석을 보라. 정신이 번쩍 들고 무릎을 치면서 마침내 그를 사랑하지 않고는 당해낼 재간이 없게 될 것이다.

그는 우리 옛그림을 옛사람의 삶의 흔적이 고스란히 배어있는 하나의 생명체로 보았다. 한 인간의 혼이 오롯이 담긴 살아있는 존재로 대한 것이다.

이 가을에 간송미술관 뿐만 아니라 국립중앙박물관의 ‘조선시대 초상화의 비밀전’이나 삼성미술관 리움의 ‘조선 화원 대전’에 관람객이 몰린 까닭은 우리 고미술에 대한 진정한 목마름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고미술이 음악과 만나 무대에 올려지면 어떻게 될까. 우리나라 공연예술을 대표하는 국립극장의 창극단, 무용단, 국악관현악단이 합심하여 2011년 국가브랜드공연으로 제작한 가무악극 ‘화선(畵仙) 김홍도’는 고미술을 또 다른 예술 공간 속에서 새롭게 창조했다.

관객들은 그 유명한 ‘씨름’과 ‘무동’이 실려있는 김홍도의 풍속화첩을 한 장 한 장 넘기는 기분으로 관람할 수 있다. 우리의 삶도, 무대도 결국은 한 폭의 그림에 불과한 것임을 말하려 했을까. 영상그림과 함께 무대위에서 현란하게 펼쳐지는 김홍도의 예술세계 속에서 한국적 정신과 형식미를 발견하게 된다.

음악 속에 빠진 그림이 있는 또 한 편의 공연이 있다. 문화관광부와 한국문화예술위원회가 주최한 아리랑 축제, ‘이것이 아리랑이다’이 그것이다. 축제의 마지막 날, 간송에서 보았던 혜원의 그림을 다시 만났다.

진도아리랑, 밀양아리랑, 강원도아리랑 등 우리 전통음악을 텍스트로 해서 전통악기와 서양악기가 함께 공존하고 있는 무대 위에 옛그림들이 너울대며 춤을 추고 있다. 해금 선율이 가지고 있는 넉넉한 호흡과 가야금의 절제미 속에서 옛그림은 한편의 서정시 같은 매력으로 다가왔다.

우리는 왜 옛그림에 열광하며 혜원과 단원을 무대 위로 부르고 있는가. 45년 째 간송미술관을 지키고 있는 한국민족미술연구소 최완수 연구실장의 답은 명쾌하다. 우리의 문화적 자존심과 자긍심 때문에 그렇다는 것이다. 어디를 보아도 ‘우리 것’이 없는 시대에 ‘우리 것’을 느끼고 볼 수 있는 점이 매력으로 다가온 것이리라.

때마침 우리 지역에서도 옛그림과 미디어 아트가 결합된 작품을 제작하려는 움직임이 있다. 예향 광주의 버팀목인 남종 문인화를 영상과 음악, 무용이 결합된 멀티미디어 작품으로 만들겠다는 의욕이다.

조선 남종화의 마지막 불꽃으로 일컫는 소치 허련은 스승인 추사 김정희로부터 지도받은 남종화의 길을 구도자처럼 정진했고, 자신의 고향인 호남에서 싹을 틔웠다. 마침내 소치에서 의재 허백련에 걸쳐 이룩한 예술적 성취는 우리 지역을 옛그림의 문화원형이 가장 잘 간직된 땅으로 자리매김했다.

여기에다 빛의 도시답게 미디어 아트가 결합하여 새로운 문화콘텐츠를 창조하려는 것이다. 남종 문인화라는 동아시아적 보편성을 가진 소중한 우리의 자산을 첨단 디지털기술과 접목하는 것은 예술과 테크놀로지 그리고 인문학의 융복합이다.

이처럼 공연예술의 창조 공간은 광대무변하다. 늦가을에 옛그림의 무한 진화를 보면서 오주석이 말한 ‘혼이 담긴 살아있는 존재’를 음미한다.

〈박선정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