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년필로 유명한 명품 브랜드기업 몽블랑은 매년 ‘몽블랑 문화예술 후원자 상’을 시상한다. 올해로 20년째인 이 상은 예술가를 직접 후원하는 게 아니라 예술가를 후원하는 사람에게 주는 상이다.

그동안 전 세계 12개국에서 160여 명이 수상의 영예를 안았는데 영국의 찰스 황태자, 스페인의 소피아 왕비, 일본의 오노 요코 등 유명인사도 눈에 띈다. 한국은 2004년 금호문화재단의 고(故) 박성용 회장이 최초로 수상했고 그 후 박영주 이건문화재단 이사장, 김영호 일신문화재단 이사장 등이 받았다.

올해 수상자는 크라운- 해태제과 윤영달 회장이다. 윤 회장은 우리 국악의 발전과 세계화를 위해 꾸준히 후원해 온 공로를 인정받았다. 국악에서 현대미술에 이르기까지 문화예술에 대한 윤 회장의 각별한 애정은 경제계에서는 모르는 이가 없을 정도로 유명하다. 그는 또한 지난달 열린 아트광주 조직위원장을 맡아 물심양면의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최근 나는 윤 회장을 통해서 아트경영, 특히 AQ(Artistic Quotient)경영의 진면목을 확인했다. AQ는 예술가적 지수를 말한다. 종래의 감성지수(EQ)가 예술을 받아들이는 수동적 의미였다면 AQ는 예술작품을 직접 만드는 창조적 능력이다.

경기도 양주시 송추 유원지 인근 100만 평에 조성중인 통합 문화예술 테마파크인 ‘아트밸리’가 윤 회장의 AQ경영 아지트다. 그는 이곳을 골프장으로 만들자는 주변의 끈질긴 유혹을 물리치고 국내 최대 규모의 예술공간으로 탈바꿈시켰다.

소수만 즐기는 골프장보다 노인, 장애인들도 쉴 수 있고 고객들과 함께 아름다움을 나눌 수 있는 예술공원으로 만드는 일이 더 가치있는 일로 생각한 터이다. 회사 임직원들은 소그룹으로 나눠 주말이면 가족과 함께 이곳을 방문해 조각 작품을 직접 만들어도 보고 각종 창의적 아이디어를 쏟아냈다.

그 결과 아트밸리 산자락을 둘러싸고 있는 약 6Km 길이의 산책로 곳곳에 나무와 돌로 만든 예술작품이 탄생했다. 작품을 직접 창조할 수 있는 예술가적 지수가 높은 직원이 좋은 제품을 만들 수 있다는 문화CEO의 경영철학이 생생히 실천되고 있는 현장인 셈이다.

시장경제가 위축되면서 기업들의 문화투자와 후원도 얼어붙었다. 우리 지역의 실정은 더욱 심각한 수준이다. 문화예술단체마다 기업후원이 끊겼다며 심각성을 호소한다. 기업메세나에 공감하여 문화마케팅을 해 온 기업들도 예외가 아니다.

그러나 진정한 문화기업은 경기가 어려울수록 돋보이게 마련이다. CEO가 직원들이 문화적으로 일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하면 문화적 마인드가 충만한 직원들이 만들어내는 아이디어와 제품, 서비스는 결국 회사를 문화적 기업으로 만드는 선순환구조를 형성한다.

중요한 것은 직원들에게 연수나 교육 차원의 접근이 아니라 문화적 자극과 체험할 수 있는 기회를 끊임없이 제공하는 일이다. 체험의 반복으로 형성된 AQ라는 창조능력은 고객의 마음으로 확장되고 전염되어 새로운 부가가치가 창출돼 기업성장의 동력이 된다.

후원하고 나눌 줄 아는 문화기업은 크라운- 해태제과와 같은 큰 기업에서나 가능할까. 그러나 ‘아너 소사이어티(Honor Society)’의 경우를 보면 희망의 단서를 발견할 수 있다. 이 모임은 1억 원 이상 기부한 고액기부자들로 구성된 단체이다. 2008년 출범이래 지금까지 88억여 원을 기부했다고 한다.

그런데 이들은 우리가 아는 재벌들이 아니다. 대부분 자수성가한 중소기업인이거나 전문직 종사자다. 할머니로부터 증여받은 전 재산 1억 원을 기꺼이 기부하고 회원이 된 대학원생도 있다. 이들이야말로 부의 진짜 가치를 터득하여 진정성 있는 나눔문화를 실천하고 있는 셈이다.

문화기업의 가치는 기업의 규모보다는 CEO의 마인드로부터 비롯된다. 무엇보다 CEO 자신이 문화를 즐기고 누릴 줄 알아야 한다. 그래야 AQ경영은 아니더라도 직원들과 함께 흔쾌히 공연장과 전시장을 찾게 된다.

깊어가는 가을, 고단하고 팍팍한 지역의 문화예술인을 위해 후원할 줄 알고 나눌 줄 아는 문화CEO를 보고 싶다. 후원과 나눔이야말로 사회발전과 변화를 이끄는 진정한 문화력, 소프트파워가 아닌가.

〈박선정 광주문화재단 사무처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