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대학원 수업에서 어느 대학원생한테서 관심을 끄는 책 한 권을 소개받았다. 소래섭 교수가 쓴 ‘불온한 경성은 명랑하라’라는 책이다. 시선을 끄는 제목에 걸맞게 흥미로운 내용이 가득하다. 소 교수는 이 책에서 ‘명랑’이라는 말이 본래 의미에서 벗어나 1930년대 이후 어떻게 그 의미가 확장되었는가를 분석하며, ‘명랑’에 투영된 한국 근현대 문화사의 감성적 측면을 부각시켰다.

특히 내 관심을 끈 것은 책의 제7장에 등장하는 ‘모던 걸’의 존재이다. 잘 알려진 것처럼, ‘모던 걸’이란 원래 일본에서 만들어진 말이다. 즉 근대 일본에 등장한 개방적이고 향락적인 젊은 여성을 가리키던 말이다. 이 말이 ‘모던 보이’와 함께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도 크게 유행했다. 일본에서는 ‘모던 보이’를 줄여서 ‘모보’, ‘모던 걸’을 줄여서 ‘모가’라 부르기도 했다.

경성의 ‘모던 걸’은 가지각색이다. 스틱 걸(산책하는 남자를 부축하는 여성), 데파트 걸(백화점 여종업원), 엘리베이터 걸(엘리베이터 안내원), 빌리어드 걸(당구장의 여종업원) 등, 근대 들어 생겨난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걸’들이 모두 ‘모던 걸’의 범주에 속한다. 미국의 사회학자 러셀 혹실드의 표현을 빌리자면, 이들은 ‘감정노동(emotional labor)’에 종사하던 감정 노동자들이다.

여기서 중요한 것은 당대 사람들이 이들 ‘모던 걸’을 어떤 시선으로 바라보았는가 하는 점이다. ‘모던 걸’을 바라보는 사회적 시선은 그다지 곱지만은 않았던 듯하다. 근대적 서비스업에 종사하던 이들 여성은 세상 사람들의 선망의 대상이기도 했지만, 그 한편으로 신문이나 잡지의 만문(漫文)을 통해 자주 희화화되고 조롱받기도 하였다.

경성의 ‘모던 걸’을 보면서, 얼마 전까지 자연스럽게 한국사회에서 인터넷 사이트를 중심으로 퍼져나간 ‘된장녀’를 떠올렸다. 어느 친절한 누리꾼의 설명에 의하면, ‘된장녀’란 ‘명품만을 쫓아다니며 겉멋에 치중하는 어수룩한 여자’를 지칭하는 말이라고 한다.

‘모던 걸’이라는 말의 용례에 따라서 ‘된장녀’를 ‘포스트 모던 걸’이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된장녀’ 이외에도, 한국사회에는 ‘쩍벌녀’, ‘차도녀’, ‘건어물녀’, ‘헐녀’ 등, ‘-녀’로 지칭되는 여성들이 지금도 인터넷 공간을 떠돌아다니고 있다.

내가 보기에 ‘모던 걸’과 ‘된장녀’ 사이에는 몇 가지 공통점이 발견된다. 첫째 ‘모던 걸’이 되었건 ‘된장녀’가 되었건, 이들은 모두 ‘내부의 타자’에 속한다는 점이다. 여기서 말하는 ‘타자’란 당대에 통용되는 공동체적 사회 규범이나 가치관에서 일탈한(것으로 보이는) 여성을 의미한다. ‘모던 걸’이 기존 유교사회의 가정적 가치 규범에서 일탈한 여성이었다면, ‘된장녀’는 현대사회의 가치 규범에서 일탈한 여성을 비하하여 지칭하는 말이다.

둘째 ‘모던 걸’과 ‘된장녀’ 모두 여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바꿔 말하자면 이들 말에는 은연 중에 남성 중심의 시선이 담겨있다는 뜻이 된다. 이 점을 두고 섣불리 페미니즘 관점에서 비판의 대상으로 삼을 수는 없겠지만, 적어도 ‘모던 걸’과 ‘된장녀’라는 표현에서 한국사회 남성들의 곱지 않은 시선이 느껴진다는 점은 분명해 보인다. 특히 이 점에 있어서는 ‘모던 걸’의 본고장인 일본에서도 마찬가지다. 일본의 ‘모던 걸’ 탄생에는 당대 남성들의 시선이 크게 작용하였다.

셋째 ‘모던 걸’과 ‘된장녀’는 도시문화의 산물이다. 도시 중에서도 서울과 같은 대도시에서 만들어진다. ‘모던 걸’과 ‘된장녀’는 모두 도시에서 태어났으며 도시 사람들이 만들어냈다. 당연히 그 활동무대도 도시이다.

‘모던 걸’은 경성이라는 도시를 활보했기 때문에 ‘모던’한 것이지 시골에서라면 결코 ‘모던’할 수가 없다. ‘된장녀’의 경우도 마찬가지이다. 시골의 ‘된장녀’란 너무 자연스러워서 오히려 그 희화적 의미가 전달되지 않을 것이다.

‘모던 걸’과 ‘된장녀’는 모두 새로운 문명이 시작되는 사회문화적 격변기에 기성세대 남성들의 시선이 작용한 결과, 공동체 ‘내부의 타자’로 도시에서 탄생하였다. 마치 경성의 ‘모던 걸’이 서울의 ‘된장녀’로 다시 출현한듯한 생각이 드는 것은 나만의 착각일까.

〈전남대 김용의 교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