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는 은혜를 모르는(?) 남자였다. 지난 1999년 한 TV프로그램에 출연해 아내와의 결혼 일화를 소개하며 자신의 ‘과오’를 자랑하듯 얘기했다.

“결혼할 무렵(1962년)제가 홀아비인데다 가난하고 자식까지 딸려 여러 조건이 좋지 않았어요. 반면에 아내는 조건이 훨씬 더 좋았습니다. 그래서 내가 당시 상당히 공을 들였어요. 하지만 결혼 후에는 내가 조금 배짱을 부렸어요. ‘시집 못 간 노처녀를 거둬줬으니 내게 고마워 해야 한다. 그러니 나한테 좀 더 공손하게 하라’고 했어요. 그러면 아내는 물에 빠진 사람 건져 놓았더니 보따리 달라고 한다며 목소리를 높였어요.”(웃음)

그는 아내의 진심도 모르는 속좁은 남자였다. “(김대중내란 음모사건으로) 사형선고를 받았던 1980년, 아내가 ‘제발 김대중을 살려 달라’고 기도해야 하는데 글쎄 ‘하나님 뜻에 따르겠다’고 하는 겁니다. 간절히 애원해도 아쉬운 처지에 (마치 다른 사람일 처럼) 하나님의 뜻대로 하라니, 정말 섭섭하더군요.”

김 전 대통령의 유머감각을 엿볼 수 있는 이 에피소드는 동시에 두 사람의 순탄치 않았던 지난 세월을 말해준다. 그의 말대로 ‘대통령이 꿈’인 것 이외에는 내세울 게 별로 없었지만 이희호 여사는 파란만장한 정치인생 내내 때론 반려자로, 때론 동지로 그의 곁을 지켰다.

특히 이희호 여사의 ‘뜨개질 순애보’는 DJ에게 큰 힘이 됐다. 지난 76년 ‘3·1 민주 구국 선언’을 주도한 김 전 대통령은 77년 3월 징역 5년의 형이 확정돼 진주교도소에 수감됐다. 추위를 잘 타는 남편을 위해 아내는 직접 뜨개질한 벙어리 장갑과 스웨터를 교도소로 보냈다. 아내의 정성이 하늘에 닿았을까. 이듬해 12월 김 전 대통령은 형집행정지로 가석방됐다.

80년 7월 ‘김대중 내란음모 사건’으로 청주교도소에 수감되자 아내는 또다시 뜨개질을 했다. 교도소에서 겨울을 두 번 보낸 남편은 82년 12월 형 집행정지로 다시 석방됐다. 말 그대로 기적이었다.

이제는 더 이상 뜨개질할 일이 없을 줄 알았던 팔순의 아내는 다시 뜨개바늘을 잡았다. 이번엔 교도소가 아닌 병실의 남편을 위해서였다. 병세가 악화되면서 손과 발이 차가워진 남편을 위해 지난 6일 손수 장갑과 덧신을 뜨개질했다.

남편이 떠나기 직전인 지난 18일 오후 1시20분. 아내는 “하나님, 마지막으로 한 번만 더 (그이를) 저희에게 보내 주세요”라며 간절히 기도를 올렸다. 하지만, ‘네 번째 장갑’은 끝내 기적을 일으키지 못했다.

그리고 19일 아내는 마지막으로 남편을 보내는 입관식에서 자서전 ‘동행’의 앞표지 뒷면에 친필로 ‘너무 쓰리고 아픈 고난의 생을 견딘 당신을 나는 참으로 사랑하고 존경했습니다. 자랑스럽습니다’라는 이별편지를 써 관에 넣었다.

아내의 사랑이 듬뿍 담긴 따뜻한 털장갑을 낀 채 영면한 DJ. 은혜도 모르고 진심도 몰라주는 야속한(?) 남편이었건만 그녀에게는 늘 ‘자랑스러운’ 동반자였다. 그런 아내와 47년을 동행한 DJ는 분명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남자’였다.

/문화생활부장·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