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올 가을 국전에 깜짝 놀랄만한 작품을 출품해야겠다.” 1982년 5월 광주 지산동의 초가집. 오지호(1905∼1982) 화백은 여느 때와는 사뭇 다른 표정으로 캔버스 앞에 앉았다. 80년 아프리카 여행에서 깊은 인상을 받은 세네갈 소년들을 화폭에 불러내기 위해서다. 검은 피부에 흰 이를 드러내며 건강한 웃음을 지었던 소년들은 평소 화백이 꿈꾸던 원색의 생명력, 그것이었다. 하지만, 이 그림은 그해 국전에 출품되지 못했다. 그림을 시작한 지 두 달 만에 교통사고를 당해 후유증에 시달리다 세상을 뜬 것이다. 모든 사람들을 놀라게 하겠다며 벼르던, 노년의 야심작 ‘세네갈 소년들’은 미완성 유작이 되고 말았다. 지난 1936년 세상에 나온 ‘처의 상’은 ‘지산동 안주인’ 지양진 여사가 주인공이다. 흰색 저고리와 빨간 옷고름, 옥색치마의 색상을 대비시킨 이 그림은 한국적 인상주의를 보여준 수작으로 꼽힌다. ‘열 손가락 깨물어 안 아픈 손가락이 없다’지만, 고인에게 ‘처의 상’은 그림 이상의 의미가 있는 작품이다. 집안의 반대를 무릅쓰고 화가의 길을 선택한 그를 평생 그림자처럼 내조한 부인에게 보낸 연서(戀書)였기 때문이다. 이들 작품에는 예술가이자 범부(凡夫)였던 오 화백의 삶과 열정이 고스란히 담겨 있다. 하지만, 유감스럽게도 이들 오 화백의 작품들을 광주에서는 보기 어렵다. 물론 광주 시립미술관에 몇몇 작품들이 전시되어 있지만 그의 총체적 예술세계를 접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이 지역에서 그의 작품을 보기가 힘든 이유는 지난 85년 유족들이 ‘남향집’ 등 대표작 34점을 국립현대미술관에 기증했기 때문이다. 82년 오 화백의 타계 후 가족과 미술인들이 전남도에 미술관 건립을 건의했지만 예산상의 어려움으로 결국 무산됐다. 생전 “작품 한점을 팔면 먼 객지에 딸을 시집보낸 것보다 더 마음이 아프다”던 그였지만, 영구보존할 전시장을 구하지 못해 화백의 작품들은 ‘쫓기듯’ 광주를 떠나야 했다. 방한칸 없는 천덕꾸러기 신세로 고향을 전전하느니, 자신을 불러준 과천 현대미술관을 택한 것이다. 오는 9월 새 광주 시립미술관 개관을 앞두고 오 화백의 대표작들을 광주로 가져오자는 공감대가 확산되고 있다. 전시장이 없다면 모를까, 번듯한 새 시립미술관이 광주에 들어서는 만큼 더 이상의 타향살이는 끝내야 한다는 것이다. 이와 관련 최근 광주 시립미술관은 현대미술관에 작품 영구임대를 요청하는 공문을 발송해 귀추가 주목된다. 화가의 작품은 그의 삶과 예술혼이 깃들어 있다는 점에서 분신(分身)이나 다름없다. 지역이 배출한 거장의 예술세계를 후손들이 가까이서 즐길 수 있도록 이들 유작들을 광주 시민들의 품으로 되돌려 주는 현대미술관의 전향적인 결단이 요구된다. 그가 있어야 할 곳은 ‘남향집’의 체취가 아직도 살아 숨 쉬는, 여기 광주이기 때문이다. 〈문화생활부장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