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날 우리 현실은 민족사적으로 일대 위기를 맞이하고 있다. 이에 우리 뜻있는 문학인 일동은 우리의 순수한 문학적 양심과 떳떳한 인간적 이성에 입각하여 다음과 같은 주장을 결의·선언하는 바이며….” 1974년 11월18일 오전 10시, 서울 세종로 의사회관 앞. 고은, 이호철, 이시영, 백낙청, 황석영, 조태일 등 문인 30여명이 비장한 표정을 지은 채 모여들었다. ‘우리는 중단하지 않는다’‘김지하 시인 석방하라’등이 적힌 플래카드를 앞세운 시인 고은은 ‘문학인 101인 선언’을 읽어내려갔다. 민족문학작가회의의 전신인 자유실천 문인협의회(자실)의 출범을 알리는 순간이었다. 자실은 처음부터 하나의 조직체로서 세상에 모습을 드러낸 것은 아니었다. 당시 시대가 주는 모멸감을 견디기 어려웠던 문인들이 하나둘씩 서울 청진동 술집에 모여들게 된 것이 모태가 됐다. 인근에 ‘창작과 비평사’를 비롯한 출판사들이 들어서 있어 저녁이면 청진동 일대는 술잔을 기울이는 문인들로 성시를 이뤘다. 1987년 6월 항쟁 직후 자실은 ‘민족문학 작가회의’(이하 작가회의)로 간판을 바꿔 달았다. 당시만 하더라도 작가회의는 기존 문인협회에 대항하는 진보진영의 소수단체에 불과했다. 하지만, 시대정신을 표방한 작가회의는 90년대를 거치면서 문단의 가장 권위 있는 단체로 자리매김했다. 최근 국내 대표적 진보주의 문학단체인 민족문학작가회의가 단체 명칭에서 ‘민족문학’을 빼기로 했다는 소식이다. 작가회의는 지난달 30일 회원들을 대상으로 명칭변경안에 관한 의견을 수집한 결과 투표에 참여한 회원 559명(전체 회원 1천300명) 가운데 418명(74.7%)이 명칭변경에 찬성했다고 밝혔다. 현재의 민족문학 테두리로는 조직의 현재와 미래를 담보할 수 없다는 위기감을 느껴 변화를 선택한 것이다. 사실 이번 ‘개명(改名)’은 뒤늦은 감이 없지 않다. 작가회의는 오래전부터 민족문학이라는 이름 때문에 해외에서 극우단체라는 오해를 받아왔다. 게다가 민족문학이라는 성긴 그물로는 현대 사회의 다양한 가치들을 건져내지 못한다는 자성의 목소리도 끊이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분단체제의 현 상황에서 ‘민족’을 포기하는 것은 단체의 정체성에 어긋난다는 주장에 밀려 지금껏 20년 전 간판을 고수해왔다. 작가회의는 우여곡절 끝에 내린 선택인 만큼 ‘이름에 걸맞은’ 새로운 위상을 보여줘야 할 때다. 지난 시절 민족문학이 제 역할을 한 것은 분명하지만, 이제는 어떻게 시대의 변화에 맞게 보편적인 문학가치를 실천해낼 것인가를 고민해야 하기 때문이다. 21세기는 민족이나 회의가 아닌 작가가 중심인, ‘열린 문학’의 시대다. 그리고 그 시작은 오랜 세파(世波)로 무디어진 펜촉을 갈아끼우는 것이다. 〈문화생활부장 jh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