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애의 ‘여백서원에서’] 없는 법(法)의 자리
2025년 05월 15일(목) 00:00
이즈음, 내가 지키는 여백서원 곁에서는 ‘괴테마을’이 자리를 잡아가고 있다. 괴테마을? 생소한 이름인데 뭐지? 무얼 분양하나? 뭐 독일에서 하는 일인가? 물을 수도 있는데 전혀 그렇지 않다. 여백서원이 자신을, 또 우리를 돌아보는 공간이라면 괴테마을은 그 뜻을 좀더 현대적으로 확장시킨 공간이다. 자신을 아주 잘 키워갔던 한 인물을 실물 예로 보여주면서, 자신과 사회에 대한 성찰의 시간을 주고 싶어한다. 큰 인물이 생애의 기초를 닦은 집들이 지어졌고 넓은 뜰은, 누구든 좋아하는 꽃을 가져와 심어 함께 가꾸어가며 주인이 되는 공동체 정원으로 가꾸고 있다.

30여년을 꾸준히 해오고 있는 괴테 전집 번역작업이 병행되고 있다. 이즈음은 ‘시 전집’과 ‘드라마 선집’의 교정을 보고 있는데 그 중 ‘드라마 선집’은 유독 작품 선정에 고심이 컸었다. 60년을 쓴 대작 ‘파우스트’도 그러하지만, 다른 드라마 작품도 한 편 한 편이 그야말로 인간 탐구라고 할 수 있기 때문이다. 역사, 신화, 문학의 인물들 중 청년 괴테, 장년 괴테, 노년의 괴테를 그때그때 사로잡았던 인물을 그린 만큼, 스스로 큰 인물로 성장해가는 괴테의 눈앞을 어른거리며 얼마만큼 체화되기도 했을 인간상이 보인다. 문체도 각 시기의 특징을 담으면서 한 시대의 획을 긋는다.

예를 들면 괴츠, 정확히는 ‘강철 손의 괴츠 폰 베를리힝엔’은 괴테가 스물 두 살쯤 쓴 작품인데 젊은 법학도의 관심사가 두드러져 보이고 장면 변화가 56회나 될 만큼 급하고 혼란스러워 질풍노도기의 특징이 역력하다. 주인공 괴츠는 ‘법’보다는 ‘주먹 권’이 앞서던 시대, 종교와 권력이 뒤엉키고 권모술수가 횡행하던 어두운 중세를 산 기사이다.

명예를 중시하는 용감한 기사들이 활약했지만 도둑기사도 횡행하던 시절에 백성들의 신망을 한 몸에 받던 용맹한 기사 괴츠의 올곧은 모습이 1막에서 드러난다. 괴츠의 성(城)과 반대세력인 권력자 주교의 궁(宮)이 주요무대이며 자주 싸움터가 펼쳐진다. 괴츠가 아끼던 시종 기사가 주교 측에 억류되자, 괴츠도 주교가 총애하는 기사 하나를 사로잡아 오는 것으로 이야기가 시작되는데 잡힌 기사는 괴츠의 어린 시절 친구로, 사로잡혔어도 괴츠의 성에서 기사에 합당한 예우를 받는다. 그러다 잠깐 다녀오려 주교궁에서 갔다가 그만 회유와 미인계에 휘말려 기사의 큰 덕목인 맹세를 깨고, 다시 주교 편에 서서 황제의 힘까지 빌려 적극적으로 괴츠를 모함, 공략한다.

그리하여 괴츠는 황제군에 포위 당하고 반역죄인으로 몰려 자신의 성에 연금당한다. 그러다가 발발한 농민전쟁의 와중에, 괴츠는 아꼈던, 그러나 이제는 폭도가 된 농민들에게 사로잡혀, 지휘관이 되어줄 것을 강요 받아 연금을 어기고 따를 수밖에 없게 된다. 의연한 괴츠는 결국 감옥에서 죽고 사태를 그렇게 몰고 간 장본인도 여인에게 독살 당한다.

어두운 시대를 산 한 의인의 허무한 죽음을 두고 두 마디의 논평으로 작품이 끝난다. “고귀한 사람! 그를 밀쳐내는 세기(世紀)에 화 있으라!” “그대를 제대로 알아보지 못하는 후세(後世)에 화 있으라!” 그렇게 주인공 괴츠는 죽지만, 그걸 읽는 사람의 마음에 남는 것은 무법천지 세상에서, 실은 법이 있어야 할 자리를 채우는 것, 인간의 의연함, 올곧음이다.

괴테야 자국의 역사 속 한 인물에 대한 이해와 자기 시대에 대한 메시지를 작품에 담았겠지만, 아득한 유럽 암흑시대의 혼란스러운 이야기를 굳이 이 대명천지에서 옮겨 보는 나에게는 다른 것이 보인다.

공간이 멀고 여러 세기가 흘렀고, 법의 강국 독일 뿐만 아니라 우리 역시 좋은 법을 세우려 애써왔지만, 제 아무리 보완하고 보정하고 갱신하여 촘촘한 법이 그물 같아도 그것이 얼마나 무력해질 수 있는가를 우리는 이즈음 혹독하게 체험하고 있다. 모든 걸, 만능일 수 없는 법적 해결에다만 거는가 하면, 다른 한 편으로는 바로 그걸 손에 쥔 듯한 사람들이 세상을 무법천지로 만드는 현상도 나날이 목도해야 하는 괴로운 시절을 살고 있다.

한 순간에 허물어질 수도 있는 그런 법에 우리가 무얼로 대응할 수 있겠는가. 허물어진 건 응당 나서서 힘 모아 다시 바로 세워야겠지만 그것만으로는 안 될 것 같다. 스무 살 남짓한 괴테가 250년 전에 생각한 것 이상의 대안은 떠오르지 않는다. 없는 법의 자리도, 있는 법의 자리도 그 바탕에는 언제든 인간의 의연함, 올곧음이 있어야 하지 않을까만 새삼 생각하게 된다. 물론 어찌하면 나부터 바른 행보를 할까라는 물음이 곧바로 뒤따른다. <서울대 독어독문학과 명예교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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