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죽음의 추모 - 황옥주 수필가
2025년 04월 15일(화) 22:00 가가
육신의 시작과 끝은 내 의지 밖이라 내 것이 아니다. 생성도 지수화풍의 조화요 소멸도 지수화풍의 조화다. 왔으면 가야하는 여래여거(如來如去)다. 하느님도 부처도 생겨난 대로 받아들이고 언제 떠난들 붙잡지 않는다.
효성(曉聲) 장정식님이 이승을 떠나셨다. 새 봄 꽃들이 화홍유록(花紅柳綠·꽃은 붉고 버들은 푸름)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창문 한 번 마음대로 열어보지 못한 투병의 끝이다. 이승은 곧 꽃 향이 넘칠 터인데 저승에서도 꽃이 필까?
나와 그의 인연은 초달(楚撻)의 길에 들어서서의 희미한 인연까지를 이으면 삼십 년은 넘었다. 그간의 정겨웠던 사연들을 다 풀어 놓을 수는 없음이 아쉽다. 한국수필문학회, 작가회, 광주문단, 광주수필문학회와 유네스코광주회장으로 활동하실 때도 나는 늘 곁에 있었다.
평소에 아주 건강했던 그는 등산을 즐기셨다. 그러던 어느 날 하산 길에 넘어져 대퇴골이 다치고부터 입원과 퇴원을 반복하셨다. 더러 통장관리도 내게 맡기고 개인 오피스텔 열쇠도 주셨다. 사람이 사람의 믿음을 얻는다는 것은 더 없는 축복이다. 그 대가는 의리고 신의다.
운구가 떠나던 날, 두암동 성당 장례미사에 참여해 성체를 받고 화장장으로 따라 갔다. 형식적으로 육신의 형체가 바뀌고 혼과 백이 영별하는 곳이다. 백은 혼의 집이다. 백이 타버리면 넋의 집은 사라진다. 남은 자들이 아무리 통곡하고 불러도 혼이 돌아올 체(體)가 없으니 초혼이 무슨 소용이겠는가. 허공을 맴돌 고혼 생각에 비감이 스쳐, 물젖은 동자를 남들이 볼세라 고개를 숙였다. 그분 생각때문 만은 아니다. 머잖은 날의 내 미래 모습이 겹치어 떠올라서다.
유골을 따라 담양 가톨릭공원으로 향하는데 만감이 착잡했다. 새로 지어진 납골당 6층 작은 한 칸에 유골을 안치한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백 년을 지향했던 한 사람의 혼이 머물 공간이 이리도 좁고 초라해야하는가? 별 것도 아닌 삶의 끝이 허무하고 속절없다. 납골함 문이 닫히자 이승에서의 연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인정은 조석변이고 믿음이란 한갓 물거품 같다는 것을 통감했다. 친구도 동료도 선후배도 살아있을 때 이웃이다. 재상 개가 죽으면 문전이 성시지만 막상 재상이 죽으면 발길이 끊긴다는 말이 어찌 그리 생각의 정맥을 찌르고 있는지. 오래전, 어느 신문에 텔마 톰슨의 ‘빛나는 성벽’이란 글의 한 대목이 실린 적 있었다. 신문 스크랩에 담아 놓고 간간히 읽어본다.
“서러워 마라. 세상은 어차피 혼자서 가는 것이다. 삶의 비탈길에 넘어져 울어도 일으켜 세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에는 내 아픈 눈물 받아줄 가슴도 없고 내 슬픔 닦아 줄 포근한 손길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 감수해야 할 나의 몫이다. 꽃이 활짝 필 땐 구름떼처럼 모여들던 사람들도 꽃이 지는 계절이면 아무리 예뻤던 꽃밭도 한순간에 발길을 끊어버린다. 그게 사람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다.” 백 번 옳은 말인 것 같다.
흔히 생은 괴롭고 열반은 즐겁다 한다. 기왕에 오탁악세를 넘었으니 정토의 효성님이 이승에서보다 평온하시길 빈다.
효성(曉聲) 장정식님이 이승을 떠나셨다. 새 봄 꽃들이 화홍유록(花紅柳綠·꽃은 붉고 버들은 푸름)의 꿈에 부풀어 있을 때 창문 한 번 마음대로 열어보지 못한 투병의 끝이다. 이승은 곧 꽃 향이 넘칠 터인데 저승에서도 꽃이 필까?
유골을 따라 담양 가톨릭공원으로 향하는데 만감이 착잡했다. 새로 지어진 납골당 6층 작은 한 칸에 유골을 안치한 모습을 멍하니 쳐다봤다. 백 년을 지향했던 한 사람의 혼이 머물 공간이 이리도 좁고 초라해야하는가? 별 것도 아닌 삶의 끝이 허무하고 속절없다. 납골함 문이 닫히자 이승에서의 연은 거기서 끝나고 말았다.
그의 죽음으로 인정은 조석변이고 믿음이란 한갓 물거품 같다는 것을 통감했다. 친구도 동료도 선후배도 살아있을 때 이웃이다. 재상 개가 죽으면 문전이 성시지만 막상 재상이 죽으면 발길이 끊긴다는 말이 어찌 그리 생각의 정맥을 찌르고 있는지. 오래전, 어느 신문에 텔마 톰슨의 ‘빛나는 성벽’이란 글의 한 대목이 실린 적 있었다. 신문 스크랩에 담아 놓고 간간히 읽어본다.
“서러워 마라. 세상은 어차피 혼자서 가는 것이다. 삶의 비탈길에 넘어져 울어도 일으켜 세워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세상에는 내 아픈 눈물 받아줄 가슴도 없고 내 슬픔 닦아 줄 포근한 손길도 없다. 오로지 나 혼자 감수해야 할 나의 몫이다. 꽃이 활짝 필 땐 구름떼처럼 모여들던 사람들도 꽃이 지는 계절이면 아무리 예뻤던 꽃밭도 한순간에 발길을 끊어버린다. 그게 사람이고 사람 사는 세상이다.” 백 번 옳은 말인 것 같다.
흔히 생은 괴롭고 열반은 즐겁다 한다. 기왕에 오탁악세를 넘었으니 정토의 효성님이 이승에서보다 평온하시길 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