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결같이 변함없는 여여(如如)한 마음을 챙기자 - 김원명 광주 원음방송 교무
2025년 01월 17일(금) 00:00 가가
모든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면 죽음을 향해서 걸어가는데 마지막에는 자녀들에게 “너는 착하게 살아라”하고 떠난다고 한다. 보통사람들이 다 착하게 살기를 최후의 한소리로 하기 마련인데, 적어도 종교인의 최후 일념은 무엇이 되어야 할 것인가 생각해 본다. 원불교 대종사께서는 착 없는 그 자리를 보고 착 없는 그 마음을 알고 그 마음에 사무쳐서 갈 수 있도록 최후의 일념을 잘 챙기라고 하셨다.
만일 집착의 생애를 산다면 금생에 아무리 잘 살았다 해도 다음 생을 보장할 수 없다. 우리에게는 모두 블랙박스와 같은 업 주머니가 하나씩 있어서 그 속에 선업을 짓거나 악을 지은 것을 담게 된다. 그런데 선업을 지었다고 해서 반드시 좋은 곳으로 가 태어나는 것이 아니다. 범부 중생은 착심을 따라 그 영혼이 가기 때문에 그렇다.
가령 누가 미우면 원수 갚아야지 하는 착심으로 그 집에 가서 태어나고, 사랑하는 사람이 있으면 거기에 끌려 그 집에 가서 태어나고, 또 재산에 착심이 붙어 있으면 그 근처를 떠나지 못하게 된다. 착심이 있으면 그 착에 의해서 다음 생이 결정된다.
사람이 되든 짐승이 되든 또는 여자나 남자가 되든, 모든 것이 집착에 의한 결정이다. 이것을 유사학에서는 총보업(總報業)이라고 한다. 한 형제로 태어났어도 얼굴도 다르고 모양도 다르고 취향도 다른 것은 안이비설신의 육근을 사용한 것이 우리의 업보 주머니에 들어 있다가 그 지은 바대로 나타나기 때문에 그렇다. 그전에 몸이 서로 붙은 샴쌍둥이가 있었는데 한 명은 성질이 급한데 한 명은 내성적이었다고 한다.
착심으로 인해서 둘이 한 몸으로 태어났는데 전생에 지은 업보가 달라서 그 별보업(別報業)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별보업은 처음에 큰 집착으로 사람이나 동물 또는 남자와 여자가 결정된 후에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평소에 지었던 업보가 점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선업을 많이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행 정진하여 도심을 잘 챙기고 무심한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 최후 거래를 해야 한다. ‘휴휴암좌선문’ 에서는 ‘치연작용(熾然作用) 정체여여(正體如如) ’즉 천만경계에 치연히 작용하나 정체가 여여한 그 마음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인연을 맺을 때 그 사람을 챙겨서 정을 붙이다가도 일 지나면 한마음을 딱 거두어서 여여한 그 마음을 챙길 수 있어야 도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칫 이 사람 저 사람과 일을 하다 보면 며칠 동안 잔상이 남아서 그 일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마음에 장갑을 착용해서 예쁘고 미운 것은 그때 잠시 있었던 일이라 생각하고 일 끝나면 장갑을 벗어 내려놓아야 한다.
이은상 시, ‘그 집 앞’의 노랫말에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모르게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마치 중생이 죽어서 다음 생을 갈 때 집착으로 가는 것과 가기는 갔지만 못 잊어서 다시 되돌아보고 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을 찾아갔다가 이미 부모 될 분들이 단산되어서 그 집의 아이로 태어날 수 없는데도 거기에 집착하여 49일이 지나서도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사람 몸이 아닌 짐승의 몸을 받게 될 수 있다.
비록 이생에 내가 좋은 선업을 많이 지었어도 최후 일념에 그 무심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사거래를 하는 데는 텅 빈 자성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촉처(觸處)에 불유정(不留情)하라.’ 사람을 만나서 예쁘다 밉다는 것이 촉이고 또 경계를 만나는 것을 촉처라고 말한다. 일할 때는 정들여야 일도 되고 사업도 성공하는데 일을 마치면 한마음을 바로 거두어서 텅 빈 마음을 수렴하여 돈공한 무념처가 되도록 많이 연마해야 한다. 그래서 삼세제불 부처님께서는 정말로 귀신도 모르게 남도 모르게 그 마음을 끊임없이 챙기고 그 자리에 들어가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비밀히 전하는 부처님들의 일이다.
대종사께서는 공들이고 정들여서 원불교 교단을 만들었지만 죽을 때는 썩은 새끼줄 끊듯이 그리고 헌 짚신 버리듯이 간다고 했다. 시작은 끝으로 가는 과정이라 했듯이 올 한해도 정에 머물지 않고 돈공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란다.
착심으로 인해서 둘이 한 몸으로 태어났는데 전생에 지은 업보가 달라서 그 별보업(別報業)으로 다른 성격을 가지게 된 것이다. 별보업은 처음에 큰 집착으로 사람이나 동물 또는 남자와 여자가 결정된 후에 차츰 시간이 지나면서 평소에 지었던 업보가 점점 나타나는 것을 말한다.
선업을 많이 짓는 것도 중요하지만 수행 정진하여 도심을 잘 챙기고 무심한 마음이 주인이 되어서 최후 거래를 해야 한다. ‘휴휴암좌선문’ 에서는 ‘치연작용(熾然作用) 정체여여(正體如如) ’즉 천만경계에 치연히 작용하나 정체가 여여한 그 마음을 꼭 챙겨야 한다고 했다. 우리가 여러 가지 일을 하고 인연을 맺을 때 그 사람을 챙겨서 정을 붙이다가도 일 지나면 한마음을 딱 거두어서 여여한 그 마음을 챙길 수 있어야 도력이 있다고 말한다. 그런데 자칫 이 사람 저 사람과 일을 하다 보면 며칠 동안 잔상이 남아서 그 일에 집착하는 경우가 많다. 이때 마음에 장갑을 착용해서 예쁘고 미운 것은 그때 잠시 있었던 일이라 생각하고 일 끝나면 장갑을 벗어 내려놓아야 한다.
이은상 시, ‘그 집 앞’의 노랫말에 “오가며 그 집 앞을 지나노라면 그리워 나도 모르게 발이 머물고 오히려 눈에 띌까 다시 걸어도, 되오면 그 자리에 서졌습니다”라는 구절이 있다. 이것은 마치 중생이 죽어서 다음 생을 갈 때 집착으로 가는 것과 가기는 갔지만 못 잊어서 다시 되돌아보고 또 그 자리에 서 있는 것과 같다. 그래서 다음 생에 태어날 곳을 찾아갔다가 이미 부모 될 분들이 단산되어서 그 집의 아이로 태어날 수 없는데도 거기에 집착하여 49일이 지나서도 거기에 머물러 있다가 사람 몸이 아닌 짐승의 몸을 받게 될 수 있다.
비록 이생에 내가 좋은 선업을 많이 지었어도 최후 일념에 그 무심 자리를 지키지 못하면 그렇게 될 수 있다. 그러므로 생사거래를 하는 데는 텅 빈 자성에 돌아가 의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촉처(觸處)에 불유정(不留情)하라.’ 사람을 만나서 예쁘다 밉다는 것이 촉이고 또 경계를 만나는 것을 촉처라고 말한다. 일할 때는 정들여야 일도 되고 사업도 성공하는데 일을 마치면 한마음을 바로 거두어서 텅 빈 마음을 수렴하여 돈공한 무념처가 되도록 많이 연마해야 한다. 그래서 삼세제불 부처님께서는 정말로 귀신도 모르게 남도 모르게 그 마음을 끊임없이 챙기고 그 자리에 들어가고 그 자리에 안주하는 것이 비밀히 전하는 부처님들의 일이다.
대종사께서는 공들이고 정들여서 원불교 교단을 만들었지만 죽을 때는 썩은 새끼줄 끊듯이 그리고 헌 짚신 버리듯이 간다고 했다. 시작은 끝으로 가는 과정이라 했듯이 올 한해도 정에 머물지 않고 돈공한 마음으로 살아가기 바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