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소한 행복, 간절한 희망- 중 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5년 01월 09일(목) 21:30 가가
구례 시외버스터미널 정도의 규모라 결코 크다고 할 수 없지만, 시설은 현대적이고 깔끔하다. 무엇보다 채광이 좋다. 건물 내부가 무척 밝고 화사하다. 우리가 타야 할 버스는 30분 뒤에 온다고 한다. 일행들은 그새 삼삼오오 흩어져 버렸다. 아마도 봄날인 듯, 우리들은 주말에 교외로 나들이가는 참이었다.
“사실 이렇게 교외로 나가는 게 올해에 이제 겨우 두번째야. 그러고 보니 첫번째도 여기서 였네.”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독백처럼 말했다. 그리고 혼자 생각했다. ‘사는 게 뭐가 그리 바빠서 주말에 친구들이랑 놀러갈 시간도 없을까? 그래도 친구들이 있어서 이렇게 놀러도 가니 얼마나 좋아!’ 허물없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마음 설레는 나들이길이다. 행복하다. 다른 말은 더 필요없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꿈이었다. 새벽예불을 마치고 돌아와, ‘꿈만 같았던’ 조금 전의 꿈을 되새긴다. 화사하고 구김살 없는 꿈이었다. 티없는 행복만 가득한 순간이었다. 왜 꿈같은 시간들이 꿈 속에서 펼쳐졌을까? 마음 속 깊이 잠복해 있던 평범한 삶에 대한 미련이 꿈으로 떠오른 것일까? 미련을 가질만한 삶이 내게 있기나 했던가?
일상은 희노애락애오욕이라는 물감으로 그려내는 한 폭의 그림이다. 세상이 아무리 민주적이고 평등하더라도 그래서 개인이 행복할 수 있는 최선의 시스템이 갖추어져 있을지라도 희노애락애오욕이 점철된 삶의 본질, 흔히 소소한 행복으로 미화되는 바로 그 본질은 변하지 않는다. 근대 이전까지의 사회는 대체적으로 개인에게 일상 속에서의 고만고만하고 소소한 행복을 그리 쉽게 허락하지 않았다. 대다수 민중들은 일상에서 소소한 행복을 온전하게 지키기 매우 어려웠다. 밀은 ‘자유론’에서 말했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자유론’, 책세상, 36쪽)
자유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소소한 행복이자, 실존이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침탈하는 것은 국가권력이다. 권위적인 사회에서의 개인의 삶은 끊임없이 억눌리고 통제되고 강제된다. 민주주의의 성취가 정치적 영역에 머무르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각종 차별이 여러 분야에 만연하다.
21세기 문명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불과 70여년 만에 전쟁의 폐허를 딛고 당당하게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이 나라에서,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친위쿠테타가 자행되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날이 더할 수록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던 12·3 계엄의 진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집권당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보통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엄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뒤흔든다. 오죽하면 전두환이 쿠테타로 권력을 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KBS는 “보통사람들”이라는 일일연속극을 매일 저녁 방영했다. 당대 유명한 배우들이 총출동한 탓에 전혀 보통사람스럽지 않은 사람들로 도배된 드라마였다.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희망스럽지 못한’ 현실에서 꽃을 피우는 법이다. 매일 터지는 계엄 관련 뉴스를 접하며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80년대로 이 사회가 다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다시 꿈꾸게 하였다. 소소한 행복이 간절한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겨울바다처럼 싸늘하게 엄습해오는 이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다시 봄날을 꿈꾸게 한 것이다.
아직은 겨울의 한가운데, 6시가 넘어도 여전히 날이 밝을 조짐은 보이질 않는다. 비록 칠흑같은 어둠뿐이지만, 곧 날이 밝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이 어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급해 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나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리고 나는 거부한다. 모든 폭압과 불의와 차별을.
나는 희미한 미소를 지으며 독백처럼 말했다. 그리고 혼자 생각했다. ‘사는 게 뭐가 그리 바빠서 주말에 친구들이랑 놀러갈 시간도 없을까? 그래도 친구들이 있어서 이렇게 놀러도 가니 얼마나 좋아!’ 허물없는 친구들과 함께 하는 마음 설레는 나들이길이다. 행복하다. 다른 말은 더 필요없다. 이보다 더 행복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인간 사회에서 누구든 다른 사람의 행동의 자유를 침해할 수 있는 경우는 오직 한 가지, 자기 보호를 위해 필요할 때뿐이다. 다른 사람에게 해를 끼치는 것을 막기 위한 목적이라면, 당사자의 의지에 반해 권력이 사용되는 것도 정당하다고 할 수 있다. 이 유일한 경우를 제외하고는, 문명사회에서 구성원의 자유를 침해하는 그 어떤 권력의 행사도 정당화할 수 없다.”(‘자유론’, 책세상, 36쪽)
자유가 지키고자 하는 것은 개인의 소소한 행복이자, 실존이다. 그리고 그것을 끊임없이 침탈하는 것은 국가권력이다. 권위적인 사회에서의 개인의 삶은 끊임없이 억눌리고 통제되고 강제된다. 민주주의의 성취가 정치적 영역에 머무르는 사회에서는 개인의 삶을 짓누르는 각종 차별이 여러 분야에 만연하다.
21세기 문명사회인 대한민국에서, 그것도 불과 70여년 만에 전쟁의 폐허를 딛고 당당하게 선진국의 반열에 오른 이 나라에서, 계엄이라는 이름으로 친위쿠테타가 자행되었다. 도저히 믿기지 않는 일이다. 그리고 날이 더할 수록 너무나 비현실적이었던 12·3 계엄의 진실이 속속들이 밝혀지고 있다.
집권당이 바뀌고 대통령이 바뀐다고 해서 보통 사람들의 삶이 송두리째 바뀌는 것은 아니다. 그러나 계엄은 평범한 보통 사람들의 라이프스타일을 뒤흔든다. 오죽하면 전두환이 쿠테타로 권력을 잡고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던 시절, KBS는 “보통사람들”이라는 일일연속극을 매일 저녁 방영했다. 당대 유명한 배우들이 총출동한 탓에 전혀 보통사람스럽지 않은 사람들로 도배된 드라마였다.
역설적이게도 희망은 ‘희망스럽지 못한’ 현실에서 꽃을 피우는 법이다. 매일 터지는 계엄 관련 뉴스를 접하며 문득 깨달았다. 그것은 두려움이었다. ‘80년대로 이 사회가 다시 회귀하는 것은 아닐까?’ 하는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다시 꿈꾸게 하였다. 소소한 행복이 간절한 희망이 될지도 모른다는 불안과 겨울바다처럼 싸늘하게 엄습해오는 이 두려움이 나로 하여금 다시 봄날을 꿈꾸게 한 것이다.
아직은 겨울의 한가운데, 6시가 넘어도 여전히 날이 밝을 조짐은 보이질 않는다. 비록 칠흑같은 어둠뿐이지만, 곧 날이 밝을 것임을 나는 안다. 그래서 이 어둠을 두려워하지도 않고, 조급해 하지도 않는다. 다만 이 사회구성원으로서 나의 권리를 주장한다. 그리고 나는 거부한다. 모든 폭압과 불의와 차별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