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를 생각하노라면 -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11월 15일(금) 00:00
“나는 화가 많아.”, “나는 화를 잘 내요.” 아마도 이런 말들 자주 하며 살 겁니다. 화가 많으니 자주 화를 내보내겠지요. 화라는 놈은 만들 때도 괴롭지만, 내보낼 때도 괴롭습니다. 어쩌자고 쓸 데도 없는 화를 그리도 자주 만들어서, 사서 고생하는 것인지 모르겠습니다. 옛날 사람들은 화를 마음 속에 가득 쌓아두는 것이라 생각한 모양입니다. “화를 낸다”, “화가 많다.” 라고 말하는 걸 보면 그렇게 생각한 것이 틀림없습니다. “슬픔이 난다.”, “즐거움이 많다.” 이런 말은 없잖아요.

그런데 참 이상합니다. ‘슬프다’, ‘즐겁다’, ‘화가 난다‘ 등은 감정을 나타내는 말들인데 어찌된 셈인지 화만 혼자 명사일까요? 왜 그럴까요? 감정이 형용사인 것은 당연한 이치입니다. 감정은 내 마음의 상태이고, 그런 상태를 묘사하는 것이 언어이니, 감정은 당연히 대상을 가리키는 명사보다 상태를 표현하는 형용사가 더 어울립니다. 감정 자체가 곧 나입니다. 나 자신과 분리할 수 없는 나의 일부인 셈이지요.

유독 화는 다른 감정과 달리 명사입니다. 화는 나의 일부가 아닌 나와 별개의 그 무엇이라는거죠. 그래서 서로 주거니 받거니 하는 일종의 물건으로 취급하고 싶은 모양입니다. 아마도 화를 자신의 일부로 인정하고 싶지 않은 마음이 우리 안에 도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이건 절대로 나의 마음이 아니야. 어디까지나 저 인간이 내게 준 것이야.”라는 일종의 핑계가 명사로서의 화 안에 담겨 있다고나 할까요. 내 것이 아니니 버려도 되는 그럴듯한 명분도 그 속에 함께 녹아 있습니다.

굳이 화를 명사로 쓴 것은 어쩌면 일종의 희망사항은 아닐까요? 다른 감정들과 달리 고통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자신에게서 떼어놓고 싶은 그런 바람 말입니다. 고통이라는 말을 하고 보니 어쩌면 화는 감정이 아닐 수도 있겠습니다. 인간이 느끼는 맛 중에서 매운 맛은 맛이 아니라 혀가 느끼는 고통이라고 합니다. 마찬가지로 화도 역시 감정이 아니라 고통 그 자체가 아닐까요? 혓바닥의 고통이 맛을 느끼는 세포에 전해져서 우리의 뇌에 매운 맛으로 전달되듯, 감정을 느끼는 통로를 통해서 고통이 표현되다 보니 화로 표현된 것은 아닐까요? 과학적인 팩트 여부를 떠나 이렇게 생각하면 화를 대하는 마음이 조금 너그러워지는 듯합니다. 심지어 화에 대해서 애틋한 심정까지 듭니다. 실제로 불교에서는 화의 대상을 괴로움과 여러 괴로움을 일으키는 원인으로 보고 있습니다. 나아가 화를 내면 마음이 불안하게 되며, 화는 온갖 악행을 야기한다고 하였습니다.

사노라면, 속에서 화가 부글부글 끓을 때가 있습니다. 그러나 정작 남들은 나의 이 들끓는 속을 제대로 알지 못합니다. 의외로 사람들은 타인에게 관심이 별로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쏟아내는 화의 총량을 타인이 하나도 빼먹지 않고 그대로 감지한다는 보장은 전혀 없습니다. 백번 양보한다 해도 그럴 가능성은 그리 높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들이 화에 명사의 옷을 입히는 것은 화야말로 지극히 사회적인 도구이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화를 낼 대상이 없다면 화를 낼 이유도 없습니다. 길을 걷다가 잘못해서 돌부리에 채여서 발가락이 몹시 아프면, 제일 먼저 불뚝 화가 날 겁니다. 그러나 이런 화는 금방 사라집니다. 화를 쏟아낼 대상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누군가를 미워하면 그 분노의 에너지는 상당기간 지속됩니다. 화를 분출할 대상이 있기 때문입니다.

슬픔, 기픔, 우울 같은 감정들은 소통을 주된 목적으로 하지 않습니다. 관계에 영향을 미치기는 하지만 남에게 슬픔과 기쁨을 전달하고 상대방을 향하여 우울함과 즐거움을 지속적으로 내보내기 위해 이런 감정들이 생기진 않습니다. 화야말로 인간이 인간과 소통하는 직접적이고 중요한 도구 중의 하나입니다. 다만 그 패턴이 원시적이고 직접적이고 폭력적이어서 현대 문명사회와 어울리지 않을 뿐입니다. 이런 이유로 소통과 공감으로 화의 자리를 대신하는 것, 화의 에너지를 소통하고 공감하려는 욕망으로 전환하는 것은 매우 중요한 삶의 지혜입니다.

화를 대상으로 삼아 이런 저런 잡생각을 하노라면 화를 담담하게 바라볼 수 있습니다. 화를 끌어안고 토닥토닥 하노라면 어느새 또 하루가 평화롭게 지나가곤 합니다. 개개인의 하루 하루는 희로애락으로 굴곡지기 마련이지만, 멀리서 바라보는 지구별은 아름답기만 합니다. 굳이 하루하루에 일희일비 할 필요 있을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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