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쟁과 일치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4년 10월 04일(금) 07:00 가가
어릴 적, 약간의 언어 장애를 가졌던 같은 반 친구가 있었고 항상 놀림의 대상이었다. 그 친구는 자신을 괴롭히는 동급생들에게 “제대로 말도 못하는 바보냐?” 등의 놀림을 받기가 일쑤였다. 어느 날이었다. 그 놀림의 수위가 높아지더니, 누가 들어도 하지 말아야 할 말로 깔보고 급기야 폭력까지 일삼는 상황이 벌어졌다. 그래서 나는 참지 못하고 처음으로 싸웠던 기억이 떠오른다. 장난과 놀림은 그런대로 참을 수 있었다. 그런데 가시 돋치고 비하하는 말로 마음을 무너뜨리고 폭력까지 행사하면서 사람을 짓밟는 것은 참을 수 없었다.
어릴 적 나는 영웅적인 존재도 아니고, 그렇다고 남들보다 덩치가 월등히 좋은 것도 아니었지만, 분노가 치밀어 올랐다. 가만히 보고 있을 수 없었던 것 같다. 나에게 욕을 하거나 폭력을 행사하는 것도 아니었는데 분노가 치밀었고 폭력의 상황을 폭력으로 막을 수 있다고 생각했는지 모르겠다. 결과는 많이 얻어터져 얼굴의 멍을 달고 몇 주를 지냈어야 했다. 단지 좋았던 것은 말이 어눌한 친구와 가끔 얼굴이 마주칠 때면 그냥 서로 웃어주는 것이었다.
싸움! 싸움은 어떻게 시작되는 것일까? 도저히 볼 수 없고 참을 수 없는 상황을 바꾸기 위한 자발적인 보호본능이었을까? 아니면 존중하고 사랑받아야 할 생명을 불의하게 짓밟히는 것에 대한 항전이었을까? 생명의 보호와 불의한 환경의 변화를 원했는지 정확히는 모르지만 싸움의 시작은 흥분과 분노였던 것 같다. 싸움은 쌍방의 의견이 맞지 않아 그 의견을 관철시키기 위해 일어나는 신체적 및 정신적 충돌이라고 한다. 경쟁이나 다툼이라는 단어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다가오는데 이 단어들의 의미들을 되씹어 보면, 지는 것은 싫어하고 이기고 싶다는 강력한 힘이 작용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불의에 항거해 싸우는 것은 그 의미가 크게 다를 것이다.
신약성서 야고보서 4장 1절에 “여러분의 싸움은 어디에서 오며 여러분의 다툼은 어디에서 옵니까? 여러분의 지체들 안에서 분쟁을 일으키는 여러 가지 욕정에서 오는 것이 아닙니까”라고 싸움의 근원을 이야기하고 있다. 통합되지 못하고 일치하지 못하는 우리의 생각과 말과 행동은 언제나 충돌하는 것 같다. ‘지체들 안에서 분쟁’이라는 말이 꼭 생각과 말이 다르고 말과 행동이 달라 일치되지 못하고 통합되지 못한 삶을 이야기하는 것 같다. 이러한 충돌이 지속되면 생각과 말과 행동이 너무 다르니 ‘되는 일이 없네!’라며 후회하고 자책하여 자포자기하게 만들어버리는 것 같다. 분노와 흥분으로 싸움에까지 이르지 않아도 되지만 자기 삶의 주도권을 빼앗긴 사람처럼 극단적인 선택을 통해 벌이는 것이 싸움이지 않을까 생각해본다.
에페소서 4장 2절과 3절에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라는 말씀이 있다. 앞서 야고보서의 ‘분쟁’과는 다르게 ‘일치’를 언급하며 서로를 위한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싸움에서 이겨 쟁취하려는 것은 무엇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각자가 가진 원의를 통해 좋은 결과를 얻으려는 의미는 같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첨예하게 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분쟁의 결과와 일치의 결과 중에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결과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어떤 파급효과로 작용하는지, 내 삶에 어떤 영향력으로 작용하는지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분쟁의 결과는 분명하게 분열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고, 일치의 결과는 힘들고 어렵겠지만 상생의 길을 걸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앙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면서도 실현하려는 최고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통한 일치를 위해 이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르코 복음 9장 35절의 말씀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
에페소서 4장 2절과 3절에는 “여러분이 받은 부르심에 합당하게 살아가십시오. 겸손과 온유를 다하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며 성령께서 평화의 끈으로 이루어주신 일치를 보존하도록 애쓰십시오.”라는 말씀이 있다. 앞서 야고보서의 ‘분쟁’과는 다르게 ‘일치’를 언급하며 서로를 위한 평화를 이야기하고 있다. 싸움에서 이겨 쟁취하려는 것은 무엇이고, 인내심을 가지고 사랑으로 서로 참아주어 얻으려는 것은 무엇인가? 각자가 가진 원의를 통해 좋은 결과를 얻으려는 의미는 같다고 본다.
그러나 그 결과는 첨예하게 다른 반응을 일으킬 것이다. 분쟁의 결과와 일치의 결과 중에 어느 것이 좋고 나쁘다고 말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그 결과가 더불어 살아가는 우리 사회에 어떤 파급효과로 작용하는지, 내 삶에 어떤 영향력으로 작용하는지를 잊지 않았으면 한다. 분쟁의 결과는 분명하게 분열과 차별을 당연하게 여길 것이고, 일치의 결과는 힘들고 어렵겠지만 상생의 길을 걸으려고 할 것이다.
그래서 가톨릭 신앙인들이 가장 어려워하면서도 실현하려는 최고의 가치인 사랑과 평화를 통한 일치를 위해 이 말씀을 잊지 않고 기억하고 있는지 모르겠다. 마르코 복음 9장 35절의 말씀이다. “누구든지 첫째가 되려면, 모든 이의 꼴찌가 되고 모든 이의 종이 되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