믿을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없는 것- 김원명 광주원음방송 교무
2024년 08월 01일(목) 21:20 가가
우리가 사는 현실의 믿음 세계에는 여러 가지 경향이 있다. 대강 그 예를 들어보자면, 믿음이 없어서 접하는 것마다 모두 불신해 버리는 경향, 믿음이 진실을 등지고 거짓에 합류해 버리는 경향, 믿음에 대한 그 어떤 철학도 기준도 원칙도 없이 기분이나 욕심에 따라 좌우되는 경향, 이해(利害) 관계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좌우되는 경향, 친소(親疎)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좌우되는 경향, 미운 사람 예쁜 데 없고 예쁜 사람 미운 데 없는 경향, 표피적인 시비 따라 믿음과 불신이 좌우되는 경향, 속 깊은 시비선악과 장단·경중·허실에 따라 믿음과 불신이 좌우되는 경향, 모두를 믿어 주는 근본적 믿음의 기반 위에 미치지 못하는 상황은 기다려 주면서 믿을 수 있는 모습으로 개선까지 해주는 경향 등의 예가 있다.
또는 그 믿음은 쾌락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재물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명예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안일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권리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취미를 따라다니기도 하고, 상(相)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보람을 따라다니기도 하고, 기타 모든 인연과 현상을 따라다니며 희비(喜悲)를 그려낸다.
이러한 믿음 환경의 혼재 속에서 바른 믿음으로 찾아 들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믿음 선택은 가장 신중하고 지혜로워야 할 뿐만 아니라 그에 앞서 ‘믿을 수 있는 것’, ‘믿을 수 없는 것’부터 가려내야 한다. 먼저 ‘믿을 수 있는 것은 진실한 것이요, 사실적인 것이요, 실상이요, 합리적인 것이요, 믿음 가치의 비중이 높은 것’이다. 반대로 ‘믿을 수 없는 것은 거짓이요, 위장이요, 허상이요, 불합리한 것이요, 믿음 가치의 비중이 낮은 것’이다.
그런데 이러한 내용이 현실 속에 도사리고 있을 때는 그 어느 것이 믿을 수 있는 것이며, 어느 것이 믿을 수 없는 것인지 가려내기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래서 속임을 당하고 낭패를 겪으면서 이해득실(利害得失)과 고락영고(苦樂榮枯), 흥망성쇠(興亡盛衰)가 얽히고설켜 현실은 천차만별의 가관을 이룬다. 그러므로 ‘믿을 수 있는 것’과 ‘믿을 수 없는 것’을 잘 가려내는 것이 지혜로운 일이요, 이 세상에서 가장 원초적이면서 절대적 가치가 있는 일이라 이 문제를 어떻게 해결할 것이냐가 큰 숙제이다.
더욱이 혹세무민하는 미신은 믿으면서 대낮 같은 정법정도(正法正道)는 안 믿고, 사사로운 술수에는 현혹되면서 대경대도(大徑大道)는 외면한다. 이처럼 결국은 안 믿을 자리를 믿는 것이 큰 실수요, 믿을 자리를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 또한 큰 실수로 똑같이 큰 낭패를 당한다. 이 모든 뜻을 담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인과보응되는 원리를 따라 믿으라는 뜻이다. 즉 결과 보장이 확실한 것을 믿고 결과에 반하는 것이나 보장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인과보응되는 이치를 확실히 터득했다면 이것을 일러서 깨쳤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결과물은 그 이면에 반드시 원인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산물이다. 원인 없는 결과물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이것을 인연과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것은 수학 공식과 같이 정확한 것이다. 따라서 인연과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이요, 좋은 결과에 반하는 것이나 보장할 수 없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당산나무가 우리에게 죄복을 줄 수 없는 것인데, 당산나무에게 믿음을 주고 정성을 바치며 불공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을 우리는 미신이나 맹신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허망만 남는다. 오히려 시간과 경제와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시간과 경제와 정력은 우리가 정당하고 효율적인 원인과 행위에 쏟아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 어찌 한 톨인들 낭비할 수 있으랴. 이 이치를 모르면 믿을 자리는 안 믿고, 안 믿을 자리만 믿거나 또는 그 믿음이 혹중혹부중(或中或不中)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경제와 정력을 모두 소모해 버린다. 그러므로 믿음 선택은 참으로 정확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그래야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이 없게 된다. 온 인류가 인과보응의 믿음 정신에 눈을 뜨게 하고 인과보응의 신앙문에 들어서게 하는 일이 절박한 문제요, 모든 문제 해결의 원초적 과제이다.
더욱이 혹세무민하는 미신은 믿으면서 대낮 같은 정법정도(正法正道)는 안 믿고, 사사로운 술수에는 현혹되면서 대경대도(大徑大道)는 외면한다. 이처럼 결국은 안 믿을 자리를 믿는 것이 큰 실수요, 믿을 자리를 믿지 않고 의심하는 것 또한 큰 실수로 똑같이 큰 낭패를 당한다. 이 모든 뜻을 담아 한마디로 정리한다면 인과보응되는 원리를 따라 믿으라는 뜻이다. 즉 결과 보장이 확실한 것을 믿고 결과에 반하는 것이나 보장할 수 없는 것은 믿을 수 없다는 뜻이다.
이 인과보응되는 이치를 확실히 터득했다면 이것을 일러서 깨쳤다고 하는 것이다. 이 세상 모든 결과물은 그 이면에 반드시 원인이 작용하여 만들어진 산물이다. 원인 없는 결과물은 단 한 가지도 없다. 이것을 인연과의 법칙이라고 한다. 이것은 수학 공식과 같이 정확한 것이다. 따라서 인연과의 법칙에 비추어 볼 때 좋은 결과가 보장되는 것은 믿을 수 있는 것이요, 좋은 결과에 반하는 것이나 보장할 수 없는 것은 믿을 필요가 없는 것 아닌가. 예를 들면 당산나무가 우리에게 죄복을 줄 수 없는 것인데, 당산나무에게 믿음을 주고 정성을 바치며 불공할 필요가 있겠는가. 이것을 우리는 미신이나 맹신이라고 한다. 이것은 아무리 노력해도 허망만 남는다. 오히려 시간과 경제와 정력만 낭비할 뿐이다.
시간과 경제와 정력은 우리가 정당하고 효율적인 원인과 행위에 쏟아야 할 중요한 자산이다. 어찌 한 톨인들 낭비할 수 있으랴. 이 이치를 모르면 믿을 자리는 안 믿고, 안 믿을 자리만 믿거나 또는 그 믿음이 혹중혹부중(或中或不中)으로 왔다 갔다 하면서 우리의 소중한 시간과 경제와 정력을 모두 소모해 버린다. 그러므로 믿음 선택은 참으로 정확해야 하고 지혜로워야 한다. 그래야만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일이 없게 된다. 온 인류가 인과보응의 믿음 정신에 눈을 뜨게 하고 인과보응의 신앙문에 들어서게 하는 일이 절박한 문제요, 모든 문제 해결의 원초적 과제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