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혁전차’와 광장무 -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07월 26일(금) 00:00 가가
중국의 차 중에 문화혁명시대에 만들어진 차를 일컬어 문혁전차라 한다. 문화혁명시대에 만들어졌다고 해서 ‘문혁’, 벽돌 모양의 차라고 해서 ‘전차’. 전문적인 설명이 있긴 하지만 그런 것들은 차 애호가나들이나 관심 가질 일.
얼마 전, 바로 이 문혁전차를 마셨다. 오래 묵은 차 특유의 맛과 향이 있어서 마시는 즐거움이 배가되는 차였다. 차의 맛이 좋아서 무슨 차냐고 주인장에게 물으니 ‘문혁전차’라고 하였다. 이 ‘문혁’이 문화혁명의 ‘문혁’일거라는 생각은 전혀 하지 않고, 차 이름 치고는 참 독특하다고만 생각했다. 검색해보니 문화혁명시대 만든 차라고 한다. 문화혁명과 차의 조합이 상당히 낯설다.
예전에 왜 중국사람들은 광장에 나와서 단체로 춤을 추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다룬 유튜브를 본 적 있다. 요지만 말하자면 이들의 대다수는 이제 장년층이 된 홍위병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 한마디로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의 정신세계와 라이프스타일은 문화혁명시대에 멈추어 있었다.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홍위병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문혁전차는 대부분 당시 당간부들에게 상납할 목적으로 만들어진 한정판이었다. 그래서 차보다는 차를 포장하는 포장재가 더 비싸기도 했다. 세월이 흘러 당시의 제작기법으로 만든 차들까지 통칭해서 문혁전차라고 한다. 차 자체가 그리 고급스런 차는 아니다. 그러나 간혹 오랜 세월을 거치며 뛰어난 맛을 품게 된 것들은 어느새 호사가들이 즐기는 차의 반열에 들기도 했다.
광장무, 문혁전차 둘 다 모두 문혁혁명이 남긴 흔적이다. 반세기가 지났음에도 문화혁명은 여전히 자신의 흔적을 남기고 있다. 죽어도 죽지 못하고 구천을 떠도는 유령처럼, 모택동은 지금도 중국인들의 의식 속에 스며들어 있다. 영화 ‘호우시절’에서는 광장무가 참 아름답게 그려지고 있다. ‘고원원’이라는 우리에겐 매우 낯선 중국 여배우가 여주인공 메이로 나온다. 그녀는 미끄러지듯 자연스럽게 광장무를 추는 무리 속으로 들어가 한 마리 학처럼 우아하게 춤을 춘다. 하지만 이건 어디까지나 영화일 뿐이다. 호사가들의 차로 살아남은 문혁전차나 고작해야 광장에 모여 단체로 춤추는 것 말고는 딱히 할 일이 없는 늙은 홍위병세대들이나, 그리 아름다운 모습은 아니다.
일본에 전공투 세대가, 한국에 운동권 세대가 있었듯, 중국에는 그보다 훨씬 더했던 홍위병세대가 있었다. 사회와 등장배경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뒷모습의 인상은 어쩐 일인지 비슷하다. 홍위병세대가 광장무 세대로 변하고, 문혁전차는 호사가들을 위한 값비싼 차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소위 ‘운동권’이었던 나도 어느새 제도권 깊숙이 뿌리내리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문혁전차를 마신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일종의 이념이지만 민주주의는 그러한 이념들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아무리 만인을 위한 이념이라도 어떤 그릇에 담아내는지에 따라, 현실화되는 모습은 달라진다. 이는 20세기의 역사가 피로써 증명하는 바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과 박학다식한 지식이 있어도, 담아 내는 그릇이 쓸 만해야 한다. 사람의 그릇은 그 사람의 됨됨이이며, 한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갈고 닦은 수행에 의존한다.
새벽부터 안개가 무척이나 짙다. 맞은편의 행원당 건물이 흐릿하게 존재감만 내비칠 정도다.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 때문일까? 아니면 한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어영부영 살아온 인생살이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일까? 아침 댓바람부터 마음 한구석이 찹찹하다.
그나마 씁쓸해 할 추억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아주 오래전 중학생 시절,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불현듯 떠오른다. 무슨 일인지 마음의 상처를 입은 10대 소녀가 시골의 할머니 집으로 왔다. 소녀는 슬퍼하며 할머니에게 말한다. “나도 할머니처럼 여기서 살거야.” 그러자 할머니가 다정하게 대답한다. “너는 아직 벗 삼아 지낼 추억이 없어서 여기서 살 수 없단다.” 어느덧 할머니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나이가 되었다. 산다는 것은 물 흐르듯 흐르는 것이다.
“다 지나간다” 1911년에 태어나 파란만장했던 중국의 현대사를 몸소 겪고 98세에 세상을 떠난 중국의 노철학자 지센린의 에세이집 제목이다.
예전에 왜 중국사람들은 광장에 나와서 단체로 춤을 추는지에 대해 그 이유를 다룬 유튜브를 본 적 있다. 요지만 말하자면 이들의 대다수는 이제 장년층이 된 홍위병 출신이라는 것이다. 이 한마디로 단번에 고개가 끄덕여졌다. 그들의 정신세계와 라이프스타일은 문화혁명시대에 멈추어 있었다. 시대의 희생양이었던 홍위병들은 여전히 건재하고 있었다.
일본에 전공투 세대가, 한국에 운동권 세대가 있었듯, 중국에는 그보다 훨씬 더했던 홍위병세대가 있었다. 사회와 등장배경에는 많은 차이가 있지만 역사 속으로 사라진 뒷모습의 인상은 어쩐 일인지 비슷하다. 홍위병세대가 광장무 세대로 변하고, 문혁전차는 호사가들을 위한 값비싼 차로 탈바꿈했다. 그리고 소위 ‘운동권’이었던 나도 어느새 제도권 깊숙이 뿌리내리고,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문혁전차를 마신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보다 더 중요한 것이 민주주의다. 공산주의나 자본주의는 일종의 이념이지만 민주주의는 그러한 이념들을 담아내는 그릇이다. 아무리 만인을 위한 이념이라도 어떤 그릇에 담아내는지에 따라, 현실화되는 모습은 달라진다. 이는 20세기의 역사가 피로써 증명하는 바이다. 개인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훌륭한 사상과 박학다식한 지식이 있어도, 담아 내는 그릇이 쓸 만해야 한다. 사람의 그릇은 그 사람의 됨됨이이며, 한 사람의 됨됨이는 그 사람이 갈고 닦은 수행에 의존한다.
새벽부터 안개가 무척이나 짙다. 맞은편의 행원당 건물이 흐릿하게 존재감만 내비칠 정도다. 한치 앞을 분간하기 힘든 안개 때문일까? 아니면 한치 앞도 분간하지 못하고 허겁지겁 어영부영 살아온 인생살이 때문일까? 아니면 이제는 돌이킬 수 없는 지난 삶에 대한 회한 때문일까? 아침 댓바람부터 마음 한구석이 찹찹하다.
그나마 씁쓸해 할 추억이라도 있으니 다행이다. 아주 오래전 중학생 시절, 라디오에서 들었던 이야기 한 토막이 불현듯 떠오른다. 무슨 일인지 마음의 상처를 입은 10대 소녀가 시골의 할머니 집으로 왔다. 소녀는 슬퍼하며 할머니에게 말한다. “나도 할머니처럼 여기서 살거야.” 그러자 할머니가 다정하게 대답한다. “너는 아직 벗 삼아 지낼 추억이 없어서 여기서 살 수 없단다.” 어느덧 할머니의 심정이 조금이나마 이해되는 나이가 되었다. 산다는 것은 물 흐르듯 흐르는 것이다.
“다 지나간다” 1911년에 태어나 파란만장했던 중국의 현대사를 몸소 겪고 98세에 세상을 떠난 중국의 노철학자 지센린의 에세이집 제목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