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수 한 젓가락-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05월 03일(금) 00:00
고정관념은 그다지 믿을만한 것이 못된다. 나의 오래된 고정관념 중에 일요일엔 목욕탕 가는 건 아니라는 것도 있다. 일요일엔 사람들이 많을 거라는 막연한 생각 때문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며칠 전 일요일, 매우 피곤했던 나의 몸은 알량한 고정관념의 잔소리를 가볍게 무시하고 사우나로 향했다. 의외로 평일날과 별반 다르지 않았다. 하긴 사우나는 어릴 적 아버지 손에 끌려 가던 목욕탕이 아니긴 하다.

사우나를 마치고 나오니 오후 5시를 조금 넘은 시각, 거리는 한산하다. ‘일요일 저녁 거리가 원래 이렇게 한산했던가?’ 의아한 마음으로 텅빈 거리 건너편을 보니 마침 국수집이 있다. 적당히 출출했던 터라 망설임 없이 국수집으로 들어갔다. 그런데 아무도 없다. 정말 아무도 없다. 언뜻 보기에도 테이블이 12개는 족히 넘어 보이는 제법 넓은 홀인데 텅 비었다. ‘일요일이라 손님이 없나?’ 일요일이라 그러려니 내멋대로 생각하고 자리에 앉아 국수를 시켰다.

숨길 수 없는 기대감을 느끼며 국수 한 젓가락을 집어먹었다. 그런데… 한 젓가락을 먹고 나니 국수가 반 밖에 남질 않았다. 당황한 마음을 추스리며 자세히 보니 두 젓가락이면 끝날 판이다. 나름 진지하게 꽤 신경 써서 아껴 먹었지만 세 젓가락을 넘기지 못했다. 커다란 놋쇠그릇에 흥건하게 담긴 국물을 망연자실 바라보았다. 왜 이렇게 국수가 적은 건지 내 부족한 소견으로는 알 수 없었다.

거리는 여전히 한산하다. 다시 본 한산한 거리는 아까와는 사뭇 느낌이 다르다. 아무래도 일요일이니까 그럴거라 우격다짐하듯 생각할 것이 아닌 모양이다. 국수가 그토록 적은 것도 요즘 시절의 말못할 사연이 있지 싶다. 가게 주인이라고 그렇게 조금만 주고 싶진 않았을 것이다. 생각해보면 세계의 식량창고라는 우크라이나의 전쟁이 2년을 넘겼다. 올해는 과일값도 정확하게 두배가 올랐다. 어떻게든 코로나19만 잘 버티면 세상은 다시 원래대로 돌아갈거라 생각했지만 버티고 버틴 결과가 지금 이 모습이다.

아마도 호시절이었으면, 주인은 내가 건넨 국수값을 딸래미 학원비에 보탤 수 있었을게다. 덕분에 학원 원장은 밀리지 않고 임대료를 낼 수 있을 것이고, 건물주는 대출금을 상환할 수 있고, 대출금을 받은 은행은 다시 기업에 투자하고, 투자 자금을 확보한 기업은 연구개발에 힘을 쏟아 최신 핸드폰을 출시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침 핸드폰을 바꿀 시기가 된 나는 이 참에 신형 핸드폰을 장만하게 되었을 것이다.

고작 7천원 밖에 하지 않는, 몇 젓가락 되지도 않는 국수다. 나는 이 사회를 윤택하게 하겠다는 거창하고 헌신적인 사명감으로 국수를 먹지 않았다. 그냥 국수가 먹고 싶었을 뿐이다. 그뿐이다. 그런데도 내가 별 생각없이 먹은 한 그릇의 국수로 인해 세상은 활발하게 굴러간다. 복잡하게 뒤엉킨 세상 속에서 우리들의 소소한 일상이 이 세상을 굴리고 있다.

가난에는 천재지변으로 인한 불가항력적인 가난이 있는가 하면 구조적인 가난도 있다. 가난이 구조적이라 함은 나의 노력과 무관하게 세상이 항상, 일상적으로 나에게 가난을 부여한다는 뜻이다. 아무리 노력해도 풍요로운 삶은 내게 곁을 허락하지 않는다는 말이다.

다시 국수 한 젓가락 이야기를 하자면 턱없이 오른 각종 원자재값, 임대료 때문에 국수집 사장님은 딸래미 학원비는 둘째 치고 당장 장사를 접어야 하나 걱정이 태산이다. 학원 원장은 임대료를 제때 내지 못하고, 건물주는 대출금을 갚지 못해 또다른 빚을 내야 할 상황이다. 돈이 돌지 않아 은행 살림은 팍팍해지고, 연구개발에 힘쓰지 못하는 기업은 새로운 먹거리를 찾지 못해 부도의 위기에 내몰린다.

자고 나니 선진국이란 말이 실감나기도 전에 가난의 수레바퀴가 소리 없이 굴러가고 있다. 내 앞에 놓인 한 그릇의 국수가 지금 우리 실정을 여실하게 보여준다. 일찍이 부처님께서는 “가난은 가장 비참한 질병”이라고 했다. 구조적 가난이 창궐하도록 방치한다면 이는 곧 사회적 갈등과 분쟁으로 이어진다. 제왕학을 두루 익힌 왕자 출신 답게 부처님은 구조적인 가난의 위험성을 누구보다 잘 알고 계셨다.

예로부터 빈자를 돌보고 구조적인 가난을 몰아내는 것은 통치자의 기본적인 책무이다. 지금 이 나라의 백성들은 무능한 정부를 뽑은 과보로 국수 한 젓가락 먹으면서도 나라 걱정을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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