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이 외로운 그대를 위해 저녁비는 내리고- 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2024년 03월 28일(목) 21:30
오랜만의 장거리 운전에 피곤했던지 늦은 오후 무렵 의자에 앉아 나도 모르게 깜박 잠이 들었다. 정신을 차리고 보니 겨울답지 않게 제법 굵은 빗줄기가 내리고 있다. 뜻하지 않은 오후의 낮잠. 그리고 봄을 재촉하는 겨울비. 뜬금없는 외로움이 전혀 이상하지 않은 상황이다.

졸기 직전, 조지 클루니가 만들었다는 SF영화의 리뷰를 봤다. 헐리우드를 대표하는 꽃미남 배우 조지 클루니가 나이를 먹으면서 ‘고독’에 꽂혀 있는 모양이라고 리뷰를 만든 유튜버는 말한다. 나도 지난 몇 년을 고독에 취해 살아 본 터라, 장년에 들어선 조지 클루니의 심정을 충분히 이해한다. 인생의 장년기에 찾아오는 고독은 결코 달갑지 않은 손님이지만 그렇다고 문전박대할 수도 없다. 모든 인생의 손님들이 그렇듯 고독 역시 내가 오란다고 오고, 가란다고 가지 않는다. 이제는 고독과 친구하는 법도 어느 정도 터득했다고 자부하지만, 그래도 의도하지 않은 오후의 낮잠과 뒤이어 찾아온 외로움은 피할 도리가 없다. 그저 덤덤하게 맞이 하는 수 밖에. 가끔 이런 날이 불쑥 찾아오는 것도 살아가는 소소한 재미다.

무거운 몸을 일으켜 창가로 다가가 천천히 창문을 열자, 후두두두 하는 빗소리와 얼굴을 때리는 차가운 공기가 나를 반긴다. 언제나 반가운 친구들이다. 다만 평소엔 내가 이들의 존재를 느끼지 못할 뿐이다. 자세히 보면 세상엔 참 많은 친구들이 있다. ‘외로움’도 그중 하나이다.

친구로서의 ‘외로움’을 특별히 ‘적적함’이라고 부른다. 적적함을 외로움으로 받아들이는 것은 오직 사람을 통해서 그 적적함의 무게를 덜어내려 하기 때문이다. 쓸쓸함과 외로움 그리고 적적함은 비슷하지만 본질적으로 다르다. 쓸쓸함은 혼자 있다는 사실을 자각했을 때 생기는 원초적인 감정이다. 그러나 ‘혼자 있음’을 대하는 태도에 따라 쓸쓸함은 적적함으로 승화되기도 하고 외로움으로 변질되기도 한다.

‘혼자 있음’을 인정하고 수용하면 쓸쓸함은 적적함으로 승화된다. 이를테면 적적함은 홀로 떠난 여행지의 저녁, 어스름한 숙소 밖을 무심하게 바라 볼 때 느끼는 감정 같은 것이다. 이국적인 풍경, 더없이 한가한 시간들, 낯설지만 불편하지 않은 순간들은 마음을 차분하게 가라앉힌다. 일상 속에서 들뜨고 긴장되고 과열된 마음이 느긋해지고 잔잔해진다.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인간에게 적적함은 결코 자연스러운 감정이 아니다. 쓸쓸함은 어쩔 수 없이 인정하고 수용해야 할 그 무엇이다. 좋은 술이 익으려면 충분한 시간과 정성이 필요하듯, 정성과 노력을 들여 쓸쓸함을 잘 숙성시키야 적적함이 된다. 무소의 뿔처럼 혼자서 가라는 부처님의 말은 바로 홀로 있을 때 진정으로 자기 성찰의 힘과 깊이가 더해짐을 명심하라는 의미이다. 그런 까닭에 홀로 있음과 자기 성찰은 수행자의 중요한 덕목이다.

외로움은 다르다. 쓸쓸함에 누군가를 향한 그리움이 첨가되어, 쓸쓸함과 그리움이 상호 촉매하고 서로가 서로를 고조시킨 결과 만들어지는 복합적인 감정이 바로 외로움이다. 누룩 없이 막걸리가 나올 수 없듯, 쓸쓸함이 외로움으로 변질되려면 누군가를 향한 채워지지 않는 갈망이 반드시 필요하다. 누군가를 향한 갈망은 혼자 있음을 굳이 인정하지 않으려는 마음에서 비롯된다. 이것이 더 뿌리깊고 더 광범위하다. 한마디로 ‘홀로 있음’을 인정하지 못하는 마음에서 외로움은 싹튼다. 무리 짓기를 좋아하는 인간이 쓸쓸함을 견디지 못하고 쓸쓸함과 외로움을 동일시하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잃어버린 나의 반쪽’을 간절히 원하는 것은 쓸쓸함과 외로움을 혼동하는 인간의 어리석음이 발산하는 몸부림이다.

나를 스치고 지나가는 모든 인연들이 곧 나의 친구라고 믿어 의심치 않는 사람은 멘탈이 강한 사람이다. 고분고분한 사람이든 성질 사나운 사람이든, 배려심 깊은 사람이든 이기적인 사람이든, 사람이든 사람이 아니든 그 무엇과도 친구할 수 있는 마음의 여유는 곧 멘탈의 척도가 된다. 멘탈이 약한 사람일수록 마치 물건을 고르듯 자기 입맛에 맞는 사람을 골라 자신의 ‘외로움’을 지우려 한다. 그러니까 ‘홀로 있음’을 대하는 태도를 통해 자기성찰의 깊이를 가늠할 수 있는 셈이다.

하루를 마무리하는 이 시간에 돌이켜 오늘 나의 멘탈은 어떠하였는지 곰곰 되짚어 보니, 씁쓸한 미소만큼의 무게로 어스름한 저녁이 내게 다가오고 있다. 그 많던 눈들은 다 어디로 갔을까? 겨울의 끝자락, 눈이 녹은 자리에 추적추적 저녁비가 내린다. 아무래도 봄이 오긴 올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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