죄의식 없는 고통-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4년 03월 15일(금) 07:00
삶에 있어서 고통은 꼭 따라오는 것인지 아니면 우리의 욕구 충족의 결과로 고통이 주어지는 것인지 모르겠다. 고통은 육체와 정신적으로 아프거나 괴로워함을 의미하지만 자명한 사실은 이 고통을 원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일부러 고통의 삶을 선택한 사람이 있을까? 편안하고 즐겁고 행복하고 건강한 삶을 뒤로 하고 스스로 고통을 선택해 어려움을 직면하려고 하는 이들이 있을지 의문이다.

가톨릭교회는 지난 2월 14일 재의 수요일에 머리에 재를 뿌리는 것으로 사순시기에 들어갔다. 인간을 구원하기 위해서 우리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의 죽음을 맞이하신 예수의 삶을 따라 살아가겠다는 다짐으로 시작되는 죄의 회개와 정화의 시기이다. 자신이 지은 죄를 씻고 원래의 깨끗하고 순수한 존재로 돌아갈지 고민하고 반성하는 시기이다. 그래서 이 시기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를 청하고 하느님께서 주신 원래의 거룩하고 깨끗한 존재로 돌아와 참된 행복의 삶을 다시 시작하게 된다.

2000년 전 초대교회 때의 신자들과 지금 남미의 어느 국가 가톨릭 신자들은 고해성사로 자신의 죄를 고백한 후 환호성을 질렀다고 한다. 왜냐하면 죄가 깨끗이 씻겨졌으니 이제 새롭게 살아갈 수 있는 것에 감사하고, 하느님과 이웃에게 자신을 열어 더 가까워지고 더 깊게 사랑할 수 있게 된 것이 기쁘기 때문이다. 더러운 물이 담긴 유리컵에 계속 깨끗한 물을 더해주면 그 더러웠던 물이 조금 맑아지는 것을 볼 수 있다. 그리고 계속 깨끗한 물을 부어 넣으면 점점 깨끗하게 변해간다.

죄는 여러 내적인 경로를 통해 저지르게 되고 자신의 선택을 통해 죄를 짓기도 한다. 남의 탓을 할 필요가 없는 것이 언제나 죄의 결과는 자신의 선택으로 벌어진다는 것을 누구도 아니라고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가톨릭교회에서 고해성사는 삶의 여정에서 다시 기회를 얻게 되는 것이다. 불완전한 자신을 들여다보면서 철저하게 이기적이고 편협한 상태에서 교만함을 선택해 무너져내린 삶을 다시 원래의 상태로 회복하는 것이다. 그래서 삶의 여정에서 기도, 단식, 희생으로 회개(悔改)를 살아낸다.

사순시기에 기도하고 단식하고 희생하여 자신을 들여다보는 신자들, 이에 동력을 얻어 생긴 힘으로 기꺼이 어려운 이들을 도우려고 움직인다. 이 힘의 원천은 십자가상의 예수에게 있다. 죄 없으신 분이 인간의 죄를 대신해 십자가에서 죽임을 당하셨고, 그 희생이 끝내 부활이라는 영광을 차지하게 된다. 어떤 인문학자는 삶에서의 기쁨, 인생에서의 행복과도 같은 영광을 얻기 위해 ‘죄의식 없는 고통’이 수반되어야 한다고 말한다. 참 공감이 가는 말이다. 고통과 불편함과 어려움을 스스로 선택하는 사람들. 이들에게 보이는 모습은 안주하지 않고 지키려 하지 않는다는 것이다. 많은 이들이 익숙한 것이 있고, 그것이 지금까지 자신을 살아가도록 지탱해 주었다고 생각한다. 지금 누리고 있고 소유한 것이 자신을 존재하게 했으니 그것에 안주하고 지키려고 안달하는데 이것은 큰 착각이다. 익숙한 것에서 탈출하고 소유하고 누리고 있는 것에서 벗어나는 것은 정말 어려운 일이지만, 벗어남을 실현해야 진정한 자유를 찾고 인간의 참된 본질을 살아갈 수 있다. 그래서 지금의 삶과 만나는 사람들이 얼마나 아름답고 고맙고 감사하며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지를 깨닫게 되는 것이다.

해외 선교를 선택하는 사제들이 있다. 최근 천주교 광주대교구의 두 명의 사제가 남미와 같은 가난한 나라와 어려움을 겪는 나라에 선교사제로 파견되었다. 한국의 편안함과 풍요로움 그리고 익숙한 것을 포기하고 전혀 새로운 곳으로 향하는 이의 발걸음에 큰 의미가 있다. 충분히 예상되는 언어와 문화의 차이에서 오는 어려움, ‘죄의식 없는 고통’을 선택하는 이들은 고통과 어려움과 불편으로 희망을 되찾고 행복을 살아가는 기회를 얻게 될 것이다. 그래서 모든 것이 아름답고 고맙고 감사하며 귀하게 여기고 살아가야 하는 우리 삶의 여정을 깨닫게 될 것이다. 이것이 죽음과 부활을 잇는 십자가의 역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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