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찬일의 ‘밥 먹고 합시다’ 명태의 맛, 북어의 한
2023년 06월 28일(수) 22:30 가가
예전에 속초와 거진 항구에 갔었다. 그때는 아직 명태잡이가 한창일 때였다. 시쳇말로 어촌에서 자주 쓰는 문장이 있는데 “개도 만 원짜리를 물고 다녔다”는 거다. 명태가 잘 잡히면 정말 그 동네는 그랬다고 한다. 내가 갔을 때는 40여 년 전. 흥성거리는 분위기였다. 어부들이 가는 술집마다 손님이 가득 차 있었다. 명태는 그 후 남쪽에서 사라져 갔고, 이제는 러시아산에 의존한다. 러시아는 명태 쿼터를 한국에 부여하고 있다. 그 거친 러시아 앞바다 북양어장에 명태 잡는 한국 배가 목숨 걸고 출어한다. 명태 없는 한국인의 식탁은 상상할 수 없는 까닭이다.
명태는 단순히 한 어종이 아니라 국가 전체적으로 소중한 고기였고, 그만큼 잘 팔렸다. 제사상에 명태(물론 말려서 북어라고 부르는)를 쓰는 집안이 많고, 새로 가게나 회사를 차려도 고사상에 북어를 놓는다. 심지어 무명실타래에 묶어 부적처럼 걸어 둔다. 새로 뽑은 차에 달고 다니는 사람을 본 적도 있다. 북어란 말은 北魚, 즉 북쪽의 고기란 뜻이다. 차가운 물이 도는, 그러니까 우리 심리적으로 북쪽을 의미하는 38도선 언저리 위쪽에서 많이 잡히는 어종이다. 함경도와 강원도가 명태를 많이 잡았다. 명태는 말려서 유통하기 좋다. 게다가 가볍다. 그래서 화전민이 사는 산촌에도 북어가 들어갔다. 보부상이 이고 지고 갖다 팔 수 있는 몇 안 되는 생선이었다. 다른 생선보다 유독 가벼웠고 맛도 좋았다. 마른 멸치가 보급되기 전에 거의 유일하게 북어가 깊은 산촌의 어물이었다. 북어는 화폐를 대신하기도 했다.
명태는 비싼 반찬인 명란도 내주는 고기여서 더 값어치가 있었다. 조선조의 임금도 명란을 사랑해 마지않아서 주요 진상품이었다. 명란은 임금이 신하에게 내리는 하사품 노릇도 했고, 양반과 부자들이 주고받는 세찬으로 쓰이기도 했다. 고춧가루와 제피가루 등을 넣어 더 맛있게 하는 방법도 고안되었다. 요새 파는 명란은 양념을 잘한다. 고춧가루는 물론이고, 주정 등을 넣어 맛에 깊이를 넣어 준다.
명란으로 만드는 파생 상품도 많다. 즉석 식품(밀키트)으로 나온 명란 스파게티가 아주 인기 있다고 한다. 명란과 마요네즈를 섞어 튜브처럼 만들어 밥에 올려 짜먹는 제품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명란 장사와 제조를 배운 일본인이 패전 후 귀국하여 다시 명란 산업을 시작, 개발한 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고춧가루와 소금으로 양념하여 유통되었다. 부자들만 먹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필자도 어렸을 때 동네 부잣집에서 명란을 처음 얻어먹어 봤을 정도다. 소득이 높아진 요즘은 어지간하면 몇 끼 먹을 명란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명태잡이 어부들은 어로에 지치고, 나중에는 고기가 안 잡혀 폐업을 했다. 그리고는 은퇴했다. 이런 와중에 지난 역사의 아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납북 어부 고문과 간첩 조작 사건이다. 물경 3천여 명의 어부들이 납북되었는데, 귀환한 후 상당수가 현지 경찰, 검찰의 간첩 조작에 휘말렸다. 정식 영장도 없이 시내 여관에 수사실을 차려놓고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 기소했다. 많은 어부들이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쳤고, 긴 형을 살았다.
민주화 시대가 되었고, 광주항쟁을 비롯해 독재 시대에 핍박 받은 많은 인사들이 배상을 받고 명예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동해안 어부들은 겨우 몇몇 분들이 그 어렵다는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져 무죄 판결을 받은 정도에 그치고 있다. 실태 조사, 명예 회복, 국가의 공식 사과, 배상의 순서가 남아 있는데 진척이 늦다. 순전히 몇 명 지역의 시민과 양심의 힘으로 시작된 이 ‘신원 운동’은 이제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 피해보상 특별법’ 제정을 위한 추진위원회 준비 모임으로 이어졌다. 현지 언론인 엄경선 씨(전 설악신문 기자, 설악닷컴)가 산파역을 맡았다.
납북 피해 어부들은 상당수가 이미 작고했고, 생존한 분들도 연로하고 병약하다. 이들이 한을 풀지 못하고 눈 감기 전에 조속히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먹던 맛있는 명태에는 그분들의 한이 서려 있다.
명란으로 만드는 파생 상품도 많다. 즉석 식품(밀키트)으로 나온 명란 스파게티가 아주 인기 있다고 한다. 명란과 마요네즈를 섞어 튜브처럼 만들어 밥에 올려 짜먹는 제품도 있다. 물론 이런 것은 일제 강점기 한국에서 명란 장사와 제조를 배운 일본인이 패전 후 귀국하여 다시 명란 산업을 시작, 개발한 상품으로 알려져 있다.
우리나라는 오랫동안 고춧가루와 소금으로 양념하여 유통되었다. 부자들만 먹는 음식으로 알려져 있었다. 필자도 어렸을 때 동네 부잣집에서 명란을 처음 얻어먹어 봤을 정도다. 소득이 높아진 요즘은 어지간하면 몇 끼 먹을 명란 구하기는 어렵지 않다.
명태잡이 어부들은 어로에 지치고, 나중에는 고기가 안 잡혀 폐업을 했다. 그리고는 은퇴했다. 이런 와중에 지난 역사의 아픔이 드러나기 시작했다. 바로 납북 어부 고문과 간첩 조작 사건이다. 물경 3천여 명의 어부들이 납북되었는데, 귀환한 후 상당수가 현지 경찰, 검찰의 간첩 조작에 휘말렸다. 정식 영장도 없이 시내 여관에 수사실을 차려놓고 고문하여 거짓 자백을 받아 기소했다. 많은 어부들이 그렇게 몸과 마음을 다쳤고, 긴 형을 살았다.
민주화 시대가 되었고, 광주항쟁을 비롯해 독재 시대에 핍박 받은 많은 인사들이 배상을 받고 명예 회복이 되었다. 그러나 동해안 어부들은 겨우 몇몇 분들이 그 어렵다는 재심 신청이 받아들여져 무죄 판결을 받은 정도에 그치고 있다. 실태 조사, 명예 회복, 국가의 공식 사과, 배상의 순서가 남아 있는데 진척이 늦다. 순전히 몇 명 지역의 시민과 양심의 힘으로 시작된 이 ‘신원 운동’은 이제 ‘납북귀환어부 인권침해 피해보상 특별법’ 제정을 위한 추진위원회 준비 모임으로 이어졌다. 현지 언론인 엄경선 씨(전 설악신문 기자, 설악닷컴)가 산파역을 맡았다.
납북 피해 어부들은 상당수가 이미 작고했고, 생존한 분들도 연로하고 병약하다. 이들이 한을 풀지 못하고 눈 감기 전에 조속히 특별법이 제정되어야 한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먹던 맛있는 명태에는 그분들의 한이 서려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