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픔을 나누고 위로하는 것이 먼저 아닌가- 최현열 광주 온교회 담임목사
2022년 11월 25일(금) 00:45 가가
어느 목사님이 본인에게 있었던 이야기를 들려주었다. 작은 교회에 담임 목사로 부임하여 열정적으로 일을 하고 행복한 목회를 하는 중에 아주 큰 일이 닥쳤다고 한다. 목사의 아들과 장로의 아들은 고등학교 3학년 동급생으로 여름 내내 보충수업 등의 이유로 방학 없이 지내다 한 주간의 짧은 휴식 시간을 얻게 되었다. 그래서 세 명의 친구들과 함께 시골 할아버지 댁에 방문을 하였고 전날 큰 비로 불어난 강에서 그만 장로님의 아들이 익사 사고를 당하고 말았다. 전화를 통해 들려 오는 아들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는 순간 그 목사는 ‘이제 끝났다’라고 여기며 털썩 주저앉고 말았다고 한다. 목사의 아들은 무릎을 꿇고 죽은 친구의 아버지인 장로에게 울며 죄송하다는 말을 반복하였다. 죽은 학생의 아버지는 아들의 주검을 보며 ‘하나님이 천사가 필요해서 아들을 부르셨나 보다’ 하며 아들 친구들을 부둥켜안고 한참을 울었다고 한다.
드라마 치유를 공부할 때 실습시간 어느 목사님이 생각난다. 아직도 응어리가 남아있는 아픔이 있다며 조심스럽게 말을 꺼냈다. 성수대교가 무너졌을 때, 동생의 가족이 모두 죽었다고 했다. 자신은 도저히 하나님을 이해할 수 없다며 눈물을 흘리며 말을 이어갔다. 신앙심도 좋았던 동생 부부, 그날도 새벽 기도회에 참석하기 위해 교회에 가던 길이었고 가기 싫다는 딸을 깨워서 억지로 함께 가던 길이었다. 끝까지 짜증내며 집에서 잠을 자던 그 조카만이 무사한 상황이 되었다. 그 사고 현장에서 사망했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억장이 무너지고 기가 막혔다고 한다. 시간이 많이 지난 시점임에도 그 아픔이 가시지 않아 입술을 떨며 말하던 그 모습이 생생하다. 그 아픔을 떨쳐 버리려 몸부림을 치는 그분에게 어떤 것이 위로가 될까.
우리 삶의 현장에서는 많은 이들의 아픔을 경험한다. 목사의 일이 많은 이들의 아픔을 들어야 하고 육신의 질병으로 고통을 당하는 이들을 위로하며 기도해 주어야 한다. 그런데 내가 위암에 걸려 전절제 수술을 하고 가장 뼈아프게 후회한 것은 아픈 신자들을 방문하여 위로하고 기도할 때 오히려 상처를 주고 아프게 했다는 사실을 깨달았을 때였다. 내가 위암임을 알기 바로 한 달 전에 교회 집사님의 남편이 위암 3기로 수술을 하게 되었다. 병문안을 갔을 때 나는 웃으며 이렇게 말했다. “위암은 완치율도 높고 사는 데 문제가 없다고 하니 걱정하지 말고 힘내세요”라고 말이다. 그분의 두려움과 아품을 전혀 모른 채 그런 말이 위로랍시고 했던 것이다. 내가 수술대에 올라 수술실로 들어갈 때 교회 장로님이 내 손을 꼭 잡아 주시며 이마에 입을 맞추어 주셨다. 어느것이 위로이고 공감인가.
신약성경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다니실 때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고 매우 많은 인파들이 모였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침 그때 예루살렘에 큰 사고가 있었다. 예루살렘의 실로암 못에 망대를 설치하는 인부들 열여덟 명이 망대가 무너지며 죽게 된 것이다. 이 사고를 두고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이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실로암 망대 공사비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며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예수는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꾸짖으며 “실로암에서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은 어떠하냐? 다른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그들이 죄를 더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누가복음 13:4-5a, 우리말 성경)라고 말씀해 주셨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고 책임지게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이들의 죽음을 정치와 정쟁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급급하냐는 것이다. 사회적 저변이 아픔을 공감하고 통회하는 사회가 되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지도자나 책임자는 스스로 통감하며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닌가. 아픔을 당한 이들의 가족 앞에서 울어 주고 원망을 들어 주면 된다. 때리면 맞고 멱살을 쥐면 잡혀 주고 그러면서 모든 것이 지도자의 책임인양 몸 둘 바를 모르면 그러면 된다. 회피하고 도망을 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개역개정) 이 말씀이 사무친다. 유족들은 울고 있는데 왜 그들은 옆에서 싸우고 있는가.
신약성경 누가복음 12장에 보면 예수께서 다니실 때 무리 수만 명이 모여 서로 밟힐 만큼 되었다고 표현하고 있다. 이것은 그만큼 영향력이 강했고 매우 많은 인파들이 모였다는 것을 표현하는 것이다. 마침 그때 예루살렘에 큰 사고가 있었다. 예루살렘의 실로암 못에 망대를 설치하는 인부들 열여덟 명이 망대가 무너지며 죽게 된 것이다. 이 사고를 두고 유대인들은 빌라도 총독이 성전에 바쳐진 돈을 빼앗아 실로암 망대 공사비로 사용했기 때문에 그들이 벌을 받아 죽었다고 생각하며 떠들고 다녔다. 그러나 예수는 떠들고 다니는 사람들을 꾸짖으며 “실로암에서 탑이 무너져 죽은 열여덟 명은 어떠하냐? 다른 모든 예루살렘 사람들보다 그들이 죄를 더 많이 지었다고 생각하느냐? 그렇지 않다.”(누가복음 13:4-5a, 우리말 성경)라고 말씀해 주셨다.
누구의 잘못인지 따지고 책임지게 하는 것도 필요한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왜 많은 이들의 죽음을 정치와 정쟁의 도구로 이용하는 데 급급하냐는 것이다. 사회적 저변이 아픔을 공감하고 통회하는 사회가 되면 그 책임을 다하지 못한 지도자나 책임자는 스스로 통감하며 책임 있는 자세를 취할 것이 아닌가. 아픔을 당한 이들의 가족 앞에서 울어 주고 원망을 들어 주면 된다. 때리면 맞고 멱살을 쥐면 잡혀 주고 그러면서 모든 것이 지도자의 책임인양 몸 둘 바를 모르면 그러면 된다. 회피하고 도망을 치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다. “즐거워하는 자들과 함께 즐거워하고 우는 자들과 함께 울라”(로마서 12:15 개역개정) 이 말씀이 사무친다. 유족들은 울고 있는데 왜 그들은 옆에서 싸우고 있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