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창의회맹소 대장 기삼연
2019년 09월 09일(월) 04:50 가가
조선시대의 의병(義兵)을 말할 때 첫째로 꼽을 만한 의병장은 대체로 호남 출신이 가장 많다. 의병으로서의 진면목은 필연코 임진왜란 시절의 전투에 참여한 분들이니 김천일·고경명·김덕령 장군 같은 분들은 누가 뭐라 해도 최고봉이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한말 조선 최고의 성리학자이자 척사위정파의 효장이던 노사 기정진은 “의병장이란 난(亂)을 구하고 폭도들을 주멸(誅滅)함이다.(義兵本救亂誅 㬥之謂)”라고 말했다. 바로 김천일 장군의 문집에 서문으로 썼던 글에 나오는 말이다.
장성 출신으로 노사 기정진의 문하에서 글을 배웠고 집안의 조카로 의병정신까지 배웠던 성재(省齋) 기삼연(奇參衍:1851∼1908)은 임진왜란 이래 호남 의병장들의 뜻을 받들어 한말 폭도들인 왜군과 싸우다가 장렬하게 순국한 의병장이었다. 기정진의 손자로 한말 호남 의병을 최초로 일으킨 송사 기우만의 의진(義陳)에 제일 먼저 합류했다. 기삼연은 선유대원들의 회유로 의병이 해산되자 다시 의병을 일으켜 호남창의회맹소(湖南倡義會盟所)라는 이름의 의병부대의 대장으로 추대되어 본격적인 전투를 했다. 그는 많은 왜군들의 목을 베기도 하며 의병으로서 의기야 높았지만 강한 왜군에게 이길 수가 없었고 끝내 전쟁에 패하여 붙들리는 신세가 되었다. 담양에서 기습 공격을 받아 체포된 기삼연은 광주로 붙들려 온 뒤 광주의 천변에서 총살을 당하는 불행을 당하고 말았다.
최초의 항일 의병장 기우만은 초기 의병 전투에서 패한 뒤, 뒷날 ‘호남의사열전’(湖南義士列傳)이라는 값진 저술을 남겼다. 그 열전의 첫 번째로 오른 의병장이 바로 기삼연이었다. 호남의 대표적인 학문가로 많은 학자가 배출된 행주기씨여서 ‘가세유행’(家世儒行), 즉 대대로 유학에 종사한 집안 출신임을 밝히고, 젊은 시절부터 장부로 태어나 뜻을 펴지 못하고 집안에 누워 있다 죽어서 풀과 나무처럼 썩는다면 태어난 이유가 무엇이겠느냐면서 의기가 당당했던 기삼연을 설명해 주었다. 기우만은 또 말한다. “내가 나주에서 의병을 일으키자 기삼연이 최초로 참여했으며 병법에도 밝아 백마를 타고 왕래하였으므로 보는 사람들이 ‘백마장군’이라고 호칭했다.” 그의 뛰어난 장군으로서의 지략까지 칭송한 것이다.
망국의 소식을 듣자 아편을 마시고 자결했던 애국자이자 큰 시인이던 매천 황현은 그의 ‘매천야록’에서 ‘호남 지방의 의병’이라는 제목 아래 “이때에 이석용(李錫庸)은 임실에서, 김태원(金泰元)은 함평에서, 기삼연은 장성에서, 문태수(文泰洙)는 무주에서, 고광순(高光洵)은 동복에서 기의(起義)하여 일시에 바람이 일 듯 일어났다”라고 말하여 1907년의 전라도 의병 활동을 말해 주었다. 기우만을 이은 호남의 의병운동은 기삼연에 이르러서 호남창의회맹소가 창립되어 모두 그 휘하에 모여 대대적인 왜군 섬멸의 작전을 펼 수 있었다. 뒷날의 심남일 장군, 전해산 장군 등 기라성 같은 의병장들이나 기타의 많은 의병들이 함께 싸울 수 있는 분위기를 일으킨 의병장 또한 기삼연이었다.
근래 호남정신을 연구하는 사람이 ‘왜 호남이 의향인가?’라는 의문을 품었다가도, 한말 의병 활동을 살펴보니 호남 사람들의 의기가 얼마나 높고 또 죽음을 불사한 의병 투쟁의 치열함을 읽고 나니 바야흐로 호남이 의향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람이 있다. 임진왜란의 의병 투쟁은 당연히 호남이 주도했고 그 뒤로도 국난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투쟁에 앞장선 사람들이 호남 사람임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런 정신이 계승되어 동학혁명,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나는 5·18 당시 5·18민중항쟁에 참여하면서 이 싸움이야말로 딱 들어맞는 제목이 ‘5·18광주의거’이고 이 호칭으로 바로 그때의 기록을 남겼다. ‘광주의거’이자 ‘시민항쟁’이 바로 5·18이었다는 것이 지금이야 보통 명사이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의병이란 난을 구하고 폭도들을 주멸하는 것이므로, 중무장한 계엄군이라는 폭도들이 양민을 학살할 때, 그들을 주멸하려고 총칼로 싸운 시민항쟁이 ‘의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왜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는 노예가 된다는 기삼연의 의병정신에서 광주시민항쟁도 연유했다면 역시 광주는 의향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
근래 호남정신을 연구하는 사람이 ‘왜 호남이 의향인가?’라는 의문을 품었다가도, 한말 의병 활동을 살펴보니 호남 사람들의 의기가 얼마나 높고 또 죽음을 불사한 의병 투쟁의 치열함을 읽고 나니 바야흐로 호남이 의향임에 의심의 여지가 없다는 것을 알았다는 사람이 있다. 임진왜란의 의병 투쟁은 당연히 호남이 주도했고 그 뒤로도 국난이 있을 때마다 가장 먼저, 가장 강렬하게 투쟁에 앞장선 사람들이 호남 사람임은 모두가 인정하고 있다.
그런 정신이 계승되어 동학혁명, 광주학생독립운동, 5·18민중항쟁으로 이어졌다는 것도 역사적 사실이다. 나는 5·18 당시 5·18민중항쟁에 참여하면서 이 싸움이야말로 딱 들어맞는 제목이 ‘5·18광주의거’이고 이 호칭으로 바로 그때의 기록을 남겼다. ‘광주의거’이자 ‘시민항쟁’이 바로 5·18이었다는 것이 지금이야 보통 명사이지만, 그때 당시로서는 죽음을 무릅쓰지 않고는 할 수 없는 표현이었다.
의병이란 난을 구하고 폭도들을 주멸하는 것이므로, 중무장한 계엄군이라는 폭도들이 양민을 학살할 때, 그들을 주멸하려고 총칼로 싸운 시민항쟁이 ‘의거’가 아니고 무엇이겠는가. 왜놈들을 죽이지 않으면 나라가 망하고 우리는 노예가 된다는 기삼연의 의병정신에서 광주시민항쟁도 연유했다면 역시 광주는 의향이 아닐 수 없지 않은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