광주에서 만나다
2019년 05월 13일(월) 00:00 가가
[최유준 전남대 호남학연구원 교수]
작곡가 이건용 선생과 광주에서 만났다. 5월 10일 밤 광주의 국립아시아문화전당에서 열린 싱가포르 차이니즈 오케스트라 연주회의 첫 번째 곡으로 이 관현악단을 위해 위촉받아 쓴 그의 ‘5월을 위한 장엄 서곡’이 초연됐다.
‘차이니즈 오케스트라’(Chinese orchestra)는 개량된 중국 전통악기를 쓰는 오케스트라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한국의 ‘국악관현악단’에 상응한다. 얼후, 생황, 비파 등 수십 종의 중국 전통악기가 어우러진 대규모 관현악단이 광주의 ‘5월’을 노래한다는 것, 그것은 연주자들이나 청중 모두에게 특별한 음악적 만남이었다.
엄밀히 말하면 ‘특별한 만남’이란 동어반복이다. 만남이란 언제나 특별하다. 특별하지 않다면 만난 것이 아니다. 매일의 반복되는 일상을 공유하는 이들끼리는 서로 ‘만난다’라고 표현하지 않는다. 그들의 관계도 특별해질 때 새삼스레 ‘만남’이 된다. 요컨대 만남이란 낯선 것과의 마주침, 새로운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접촉의 화학반응을 담고 있다.
넓게 보면 이 만남과 마주침의 역사가 ‘근대’(Moderne)다. 하지만 서양이 주도한 근대의 만남이란 종종 일방적 지배와 억압으로 귀결되었다. 서양이 비서양을, 정신(이성)이 몸(감성)을, 인간이 자연을, 남성이 여성을 그렇게 만났다. 하지만 21세기의 또 다른 ‘근대’는 그와는 다른 만남, 곧 지배하지 않는 수평적 만남을 요청하고 있다. 그 요청에 비서양, 나아가 한국이 속한 아시아가 응답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음악과 공연예술이 그 응답의 모델을 앞장서 제시해 보이고자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공연예술은 서로 다른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최근 한국의 공연예술계 전반에서 중국과 한국의 만남은 두드러져 보인다. 지난 4월 서울의 국립극장에서 초연되어 화제를 불러일으켰던 국립창극단의 창극 ‘패왕별희’가 대표적이다. 국립창극단은 대만에서 경극의 현대화에 힘써 온 연출가 우싱궈(吳興國)와 한국에서 판소리 현대화의 독특한 버전을 제시해 온 이자람의 ‘만남’을 유도했다. 의상과 제스처, 무술 연기 등 시각적 요소에서 비교우위를 갖는 경극과 음 예술의 경지에서 장점이 두드러지는 판소리의 만남을 통해 양국 전통예술의 시너지 효과를 기한 것이다.
한중 만남이라는 측면에서 정율성의 오페라 ‘망부운’도 특기할 만하다. 작년 12월의 예비 공연에 이어 지난 3월 말에 광주 빛고을시민문화관에서 정식 공연을 마친 오페라 ‘망부운’은 하루는 한국 배역과 한국어로, 다음 날은 중국 배역과 중국어로 공연되었다. 이렇듯 이중언어의 사용, 소수민족 설화를 바탕으로 한 작품의 소재 등 중국과 한국 양방향으로 열려 있는 텍스트의 유동성이 흥미로웠다. 작곡가와 텍스트에 공통된 이러한 경계성, 그 속에 잠재된 국제적 만남의 실현 여부가 앞으로도 이 작품의 성공과 실패를 가르게 될 듯하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 여러 나라들 사이의 관계는 고금의 역사가 보여 왔듯 위계적이거나 비대칭적일 수 있는 가능성, 심지어 제국주의적으로 변모할 위험까지 내포한다. 서로 다른 국가나 민족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수평적 만남이란 어쩌면 예술의 세계에서나 가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백일몽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적이라 한다면, 예술이 종종 삶과의 경계를 허물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융합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10일 연주회가 끝나고 작곡가와 지인들, 그의 제자들 몇과 함께 조선대 앞 어느 빈대떡집에서 자정이 넘도록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5월 광주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이 만남은 다음 날로 이어져 일행은 전날 밤 연주회가 있었던 곳, 첨단 시설을 갖춘 아시아문화전당 건물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눈부신 5월 햇살에 비친 옛 전남도청 건물의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어 본 뒤 헤어졌다.
이틀간 우리는 그렇게 아시아와, 광주와, 오랜 벗들과, 자기 자신과, 다시 만났다. 새로운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와의 조우, 그러나 동시에 지배와 폭력, 억압이 없는 수평적 만남, 그 만남을 꿈꾸고 실현하는 장소로서 광주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도시에 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만남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최유준 전남대 교수가 월요광장 새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최 교수는 클래식과 국악·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글로 풀어내는 대표적인 음악 칼럼니스트입니다. 음악의 창을 통해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차이니즈 오케스트라’(Chinese orchestra)는 개량된 중국 전통악기를 쓰는 오케스트라를 총칭하는 개념으로, 한국의 ‘국악관현악단’에 상응한다. 얼후, 생황, 비파 등 수십 종의 중국 전통악기가 어우러진 대규모 관현악단이 광주의 ‘5월’을 노래한다는 것, 그것은 연주자들이나 청중 모두에게 특별한 음악적 만남이었다.
넓게 보면 이 만남과 마주침의 역사가 ‘근대’(Moderne)다. 하지만 서양이 주도한 근대의 만남이란 종종 일방적 지배와 억압으로 귀결되었다. 서양이 비서양을, 정신(이성)이 몸(감성)을, 인간이 자연을, 남성이 여성을 그렇게 만났다. 하지만 21세기의 또 다른 ‘근대’는 그와는 다른 만남, 곧 지배하지 않는 수평적 만남을 요청하고 있다. 그 요청에 비서양, 나아가 한국이 속한 아시아가 응답하는 것은 자연스럽다. 음악과 공연예술이 그 응답의 모델을 앞장서 제시해 보이고자 하는 것 또한 당연하다. 공연예술은 서로 다른 연주자와 청중 사이의 직접적인 만남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한국과 중국, 그리고 아시아 여러 나라들 사이의 관계는 고금의 역사가 보여 왔듯 위계적이거나 비대칭적일 수 있는 가능성, 심지어 제국주의적으로 변모할 위험까지 내포한다. 서로 다른 국가나 민족의 경계에서 이루어지는 진정한 수평적 만남이란 어쩌면 예술의 세계에서나 가상적으로 실현될 수 있는 백일몽과 같은 것인지도 모른다. 희망적이라 한다면, 예술이 종종 삶과의 경계를 허물고 ‘문화’라는 이름으로 융합되는 시대를 우리가 살고 있다는 점이다.
10일 연주회가 끝나고 작곡가와 지인들, 그의 제자들 몇과 함께 조선대 앞 어느 빈대떡집에서 자정이 넘도록 막걸리를 나눠 마시고 5월 광주의 밤거리를 거닐었다. 이 만남은 다음 날로 이어져 일행은 전날 밤 연주회가 있었던 곳, 첨단 시설을 갖춘 아시아문화전당 건물의 이모저모를 살피고 눈부신 5월 햇살에 비친 옛 전남도청 건물의 아스라한 기억을 더듬어 본 뒤 헤어졌다.
이틀간 우리는 그렇게 아시아와, 광주와, 오랜 벗들과, 자기 자신과, 다시 만났다. 새로운 사건을 불러일으키는 타자와의 조우, 그러나 동시에 지배와 폭력, 억압이 없는 수평적 만남, 그 만남을 꿈꾸고 실현하는 장소로서 광주라는 도시가 있다는 것, 그리고 이 도시에 아시아문화전당이라는 만남의 장소가 있다는 사실이 다행스럽다.
최유준 전남대 교수가 월요광장 새 필진으로 참여합니다. 최 교수는 클래식과 국악·대중음악 등 다양한 장르를 글로 풀어내는 대표적인 음악 칼럼니스트입니다. 음악의 창을 통해 삶과 인간을 바라보는 새로운 시각을 만나 보시기 바랍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