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대영의 한국영화 100년] <3> 발성영화와 친일영화 시기(1935년~1945년)
첫 발성영화 ‘춘향전’에 탄성 친일영화 ‘지원병’에 탄식
변사 활약 무성영화 시대 가고 1935년 유성영화 등장
일제 1940년 ‘조선영화령…내선일체·전쟁 동원 선전
‘친일거부’ 윤봉춘·이규환 등 타국서 방황하다 체포
일제강점기 대표배우 문예봉, 해방 후 월북 인민배우로
2019년 02월 13일(수) 00:00

친일영화 ‘지원병’(1941)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 ‘춘향전’(1935)








1927년 세계 최초의 발성영화인 ‘재즈 싱어’가 첫 선을 보이자 관객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했다. 이전까지 소리 없는 활동사진을 보았던 관객들은 영화 속 인물의 입에서 소리가 흘러나오자 그 신기함에 놀랬던 것이다. 발성영화의 시대가 도래한 것이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8년이 지난 후인 1935년이 되어서야 발성영화가 만들어지게 된다. 바로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이명우·1935)이다. ‘춘향전’은 영상과 사운드가 맞지 않는 등 미숙한 면이 있긴 했지만, 관객들은 다듬이 소리와 모국어 음성이 들려오자 탄성을 자아냈다.

발성영화가 한국에 도착했다는 말은 무성영화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다는 말이기도 했다. 이는 곧 무성영화시대의 스타였던 변사들의 자리도 위태해졌다는 말이다. 하지만 변사이야기를 빼놓고 한국영화의 역사를 논할 수는 없다. 일제강점기 최대 화제작 중 한 편인 ‘아리랑’만 해도 그렇다. 1926년 10월 개봉한 ‘아리랑’은 일제강점기 내내 전국 방방곡곡에서 장기 상영했다. 무성영화였던 ‘아리랑’은 변사와 함께 전국을 유랑하며 일제강점기의 억압에서 신음하는 민중들을 위로했던 것이다.

무성영화시대에 변사의 역할은 절대적이었다. 당시의 관객들은 변사 혼자 여러 사람의 대사를 소화하고 장면을 유창하게 설명하는 놀라운 재주에 일희일비하며 영화에 흠뻑 빠졌다. 변사는 청각적 요소가 부재했던 영화에 자신만의 주관적 방식으로 관객들에게 영화의 텍스트를 전달하는 역할을 했다. 변사의 생동감 있는 해설은 관객을 사로잡아 영화의 대중화에도 한몫을 했다. 그리고 영화의 변사가 누구냐에 따라 흥행이 좌우되기도 했다. 그러나 변사들은 발성영화가 자리를 잡아가는 것과 같은 속도로 자취를 감출 수밖에 없었다.

‘춘향전’과 함께 도착한 발성영화는 변사들의 일자리를 위협한 것만이 아니다. 발성영화는 무성영화에 비해 제작비가 4배 이상 상승해 가내수공업적 제작시스템으로 영화를 찍고 있던 당시 영화계에 큰 부담이 되었다. 이런 와중에도 한국영화는 1935년에서 1939년까지 총 26편의 발성영화를 제작하며 그 명맥을 이어갔다.

그러나 한국영화는 이 무렵 일제의 통제를 받게 된다. 제2차 세계대전 당시 독일과 이탈리아가 영화법을 정비해서 영화를 선전 도구로 활용했던 것을 흉내 낸 일제는, 같은 목적을 위해 1940년 1월부터 조선영화령을 실시했다. 조선영화령 이전에는 영화 내용을 검열하는 수준이었다면, 이제 일제는 자신들의 입맛에 맞는 영화를 만들도록 강제했다. 이는 영화를 적극적으로 활용해 천황제 이데올로기를 조선 민중에게 주입하고, 최종적으로는 전쟁에 동원하기 위한 것이었다.

문예봉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영상 자료로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발성영화 ‘미몽’(1936)








당시 조선의 영화인들은 일제에 집단투항하다시피 했다. 내선일체(內鮮一體), 다시 말해 일본과 조선이 한 몸이고, 조선인도 천황의 백성이며, 조선 청년도 일본 군대에 가서 일본 군인과 나란히 총을 들 수 있다는 일제의 동화정책을 거역하지 못한 것이다.

국내에 남아 있는 필름을 토대로 친일영화의 흔적을 살펴보면 가관이 아닐 수 없다. ‘군용열차’(서광제·1938)는 최초의 친일 영화로 연설장면에서 일본말이 등장한다. 그리고 조선의 젊은이들에게 지원병 제도를 선전하고 있는 ‘지원병’(안석영·1941)에서 춘호는 이렇게 말한다. “내선일체는 이미 실현된 것이지만 국가를 위해서 싸울 땐 우리 젊은 사람도 나서야 하지 않겠나”라고. ‘반도의 봄’(1941·이병일)은 친일적인 요소가 덜하기는 하지만 한국배우들이 한국말로 대사를 하면서도 중요한 말이나 강조하고 싶은 대목에는 일본말이 등장한다. ‘집 없는 천사’(최인규·1941)는 “이 아이는 장래의 지원병이지” 라는 대사가 의미심장한데, 조선의 고아를 제국의 군인으로 만들어가는 모습이 담겨있다.

친일영화 제작은 조선영화령에 따라 기존의 영화회사를 모두 통합한 ‘조선영화제작주식회사’가 1942년 9월 설립되면서 더욱 활기를 띠게 된다. 이들 영화들은 대부분 내선일체와 전쟁 동원을 선전하는 친일영화였으며, 드디어는 한국의 배우들이 한국말로 연기하지 않고, 일본말로 연기하는 상황까지 발생한다. ‘조선해협’(박기채·1943)과 ‘병정님’(방한준·1944)속의 한국 배우들은 한국말을 단 한마디도 하지 않으며, 철저하게 일본인이 된 한국인의 모습을 보여준다. 한국의 배우가 한국 땅에서 연기를 하는데 일본말로 연기하는 수모를 당했던 것이다.

친일영화인들이 친일영화를 일본말로 찍고 있을 때 윤봉춘, 이규환 등은 일제의 협박과 회유를 뿌리치고 만주 등지를 방황하다가 체포되어 옥살이를 하거나 징용으로 끌려갔다. 그리고 해방이 되자 한국영화는 이들을 구심점으로 해 35년에 걸친 일제강점기의 악몽에서 깨어나 새 장을 열게 된다.

내선일체를 강조한 ‘반도의 봄’(1941)








현재 영상 자료로 남아있는 한국 영화 중 가장 오래된 장편 극영화는 안종화 감독의 ‘청춘의 십자로’(1934)다. 이 영화는 무성영화고, 유성영화 중에서는 양주남 감독의 ‘미몽’(1936)이 가장 오래된 작품이다. ‘미몽’은 아직 녹음기술이 완성되지 못해 음향이 불균질한 것을 확인할 수 있다. 그러나 내용적인 측면에서 보면 놀라움을 금할 수 없다. 주인공 애순(문예봉)이 딸과 남편이 있는 가정을 버리고 돈과 욕망을 좇아 안락한 생활을 제공하는 애인을 선택한다는 이야기는, 1936년의 일제강점기라는 것을 감안하면 가히 파격적인 소재가 아닐 수 없다.

이 영화 속에서 주인공 애순을 연기하는 문예봉은 일제강점기를 대표하는 배우라고 할 수 있다. 그녀는 16세 때 나운규의 추천으로 ‘임자 없는 나룻배’(1932)에 출연하면서 영화계에 데뷔했고, 한국 최초의 발성영화인 ‘춘향전’(1935)에서 춘향을 맡아 스타덤에 올랐다. 그 뒤 ‘춘풍’(1935), ‘미몽’(1936), ‘장화홍련전’(1936), ‘나그네’(1937) 등에 출연하며 당대를 대표하는 배우가 되었다. 그러나 문예봉이라고 시대의 회오리바람을 피해갈 수는 없었다. ‘군용열차’(1938)를 비롯해 ‘지원병’(1941), ‘조선해협’(1943)등 대표적인 친일영화에서도 얼굴을 찾아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문예봉은 해방 이후 월북해 북한의 배우로도 활동했다. 그러니까 문예봉은 삼천만의 연인이었다가, 친일배우가 되지 않을 수 없었으며, 그리고 북한의 인민배우가 되는 등 극적인 영화인생을 살았다.

/조대영 광주독립영화관 프로그래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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