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꼭 기억해야 할 이순신 사람들
2019년 02월 12일(화) 00:00 가가
<제1부> 의로운 땅 ③ 꼭 기억해야 할 이순신 사람들
이순신 출전 다그친 左정운·右희립 작전참모 맡은 ‘30년 선배’ 정걸
이순신 출전 다그친 左정운·右희립 작전참모 맡은 ‘30년 선배’ 정걸


임진왜란 당시 녹도만호 정운 장군이 주둔했던 녹도진성 터다. 정상에는 현충탑과 함께 정유재란 때인 1598년 8월 고흥 거금도 일대에서 벌어진 절이도해전을 형상화한 부조물이 세워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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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의 기억에서 되살아난 충무사 이순신 장군 영정. |
임진왜란의 영웅은 단연 충무공 이순신이다. 그는 영웅(英雄)을 넘어 성웅(聖雄)으로 추앙받고 있다. 하지만 아무리 지략과 무공이 뛰어났다고 혼자서 영웅이 될 수 있었겠는가. 주변에 그를 만든 사람들이 있었다. 전라도 농민과 아낙, 노비, 부장들이다. 우리는 이들을 꼭 기억해야 한다, 이순신이 이들을 믿고 함께 했던 이유를. 그래야 교과서 속 성웅 이순신이 아닌 인간 이순신을 만날 수 있기 때문이다.
여수·순천·고흥·장흥·강진·해남·완도·목포…. 전라도 곳곳에는 이순신 장군의 흔적들과 무수한 이야기가 전해진다. 장군은 부하 장졸들과 허심탄회하게 막걸리를 마시는가 하면, 한참 낮은 계급의 부하가 상을 당하면 직접 문상을 가기도 했다.
그러했기에 숱한 전투를 치르는 동안 전라도 백성들은 군량미를 모으고, 전선을 수리하고, 장군의 병사가 되어 목숨을 바쳤다. 또 전라도 아낙네들은 옷을 깁고 밥을 짓는 수발을 마다하지 않았다. 이들이 없었다면 쉴 새 없이 밀려오는 왜적을 어찌 대항할 수 있었겠는가.
그곳에 모신 충무공 영정은 ‘100원짜리 동전의 표준 이순신 영정’과는 다르다. 표준 영정의 혼은 사라진채 수려함만이 가득한 모습이 아닌 백성과 호흡을 함께 하며 왠지 지치고 고뇌하는 듯한 모습이다. 친일 화가의 영정이 아닌 백성들의 기억 속 이순신인 까닭이다. 충무사 영당에는 충무공 이순신을 중심으로 좌(左)정운·우(右)희립의 영정이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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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 영당에 모셔진 정운 |
◇“사당에 모셔달라” 이순신이 청원한 장수…영암 ‘정운’
‘나라가 오른팔을 잃었도다(國家失右臂矣)’. 정운의 전사 소식을 들은 충무공의 탄식이었다. 충무공은 직접 제문을 지어 그를 추모했다. ‘아아, 인생에는 반드시 죽음이 있고 죽고 사는 데에는 반드시 천명이 있으니, 사람이 한번 죽는 것이야 정말로 아까울 게 없으나, 내 오직 그대 죽음에 마음 아픈 까닭은… 슬프다! 이 세상에 누가 내 마음 알아주랴, 슬픔 머금고 정성 담아 한 잔 술 바치노라. 아, 슬프다’
영암 출신 충장공 정운(1543~1592) 장군은 이순신보다 2살 많고 무과 급제도 선배였다. 하지만 당시로는 엄연한 부하장수였고,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심중을 가장 잘 헤아리는 장수였다.
특히, 정운은 이순신이 임진왜란 첫 출전을 할 수 있도록 협박에 가까울 정도로 강하게 다그쳤다. 정운의 주장에 이순신 함대는 출전을 감행했고, 사흘 뒤에는 첫 전투인 옥포해전을 치렀다.
옥포해전에서 녹도만호 정운의 활약은 눈부셨다. 정운은 후부장이었으나 다른 전투선이 감히 적을 공격하지 못하자 군사들을 독력해 선봉으로 나서는 용맹함을 보였다. 이어 학익전으로 유명한 한산해전에서는 적선 59척을 격침시켰다. 한산해전은 왜군의 수륙병진 전략을 완전히 분쇄한 전투로, 임진왜란의 흐름을 바꿔놓았다. 해전에서 전공을 세우던 정운은 부산 몰운대(부산포해전)에서 적탄을 맞고 49세의 나이로 순절했다.
돌격장 정운을 잃은 이순신은 선조에게 ‘사당에 모셔달라’고 청원, 1592년 그 위패를 모셨다. 그가 녹도만호로 있던 고흥 도양읍 쌍충사다.
임란 의병장 안방준은 ‘국가를 되찾은 것은 호남을 잘 보전했기 때문이고(國家之恢復由於湖南之保全), 호남을 잘 보전한 것은 이순신의 수전에서 힘입은 것이며(湖南之保全由於舜臣之水戰), 이공의 수전은 모두가 녹도만호 정운의 용력에서 비롯되었다(舜臣之水戰皆出於鹿島萬戶鄭運首事嘗試之力也)’라며, 정운을 칭송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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충무사 영당에 모셔진 정운 |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그림자… 고흥 ‘송희립’
“전방에 싸움이 급하다. 나의 죽음을 알리지 말라.” 이순신 장군의 유명한 마지막 유언이다. 이를 받든 이가 고흥 출신 수상공 송희립(1553~1623) 장군이다.
송희립은 이순신의 그림자였다. 임진왜란 첫 전투인 옥포해전부터 최후 노량해전까지 함께 했다. 이순신의 군관이었던 송희립은 정운과 마찬가지로 이순신의 첫 출전을 종용했다. ‘전라도·경상도 등 맡은 지역을 따지지 말고 적을 토벌해야 한다’는 주장이었다.
송희립은 전쟁이 나자 형제들과 함께 의병들을 이끌고 이순신 휘하로 들어갔다. 부산포해전에서 일찍이 전사한 정운 대신 이순신의 핵심 측근이 되어 전란 내내 그의 곁을 지켰다.
경남 남해의 관음포는 이순신이 최후를 맞이한 곳이다. 1598년 11월, 노량해전이다. 노량해전은 임진왜란을 통틀어 가장 치열한 전투였다. 이순신은 관음포 앞바다에 이르러 왜선 500여 척과 교전 중이었는데, 명나라 전선이 갑자기 집중포위를 당해 명나라 제독 진린이 위험에 처하게 됐다. 이 때 이순신과 송희립 등은 왜군의 집중포화를 뚫고 구출하는 과정에서 적들에게 노출돼 송희립은 중상을 당하고 이순신은 다음날 새벽 2시께 전사했다.
이순신 최후의 현장에는 그의 아들·조카와 함께 송희립이 있었다. “이순신의 갑옷과 투구를 벗겨 붉은 담요로 주검을 싸고, 또 다시 초둔으로 덮었다. 그리고 이내 이순신의 갑옷과 투구를 입고 초둔 위에 가리고 앉아서 대신 깃발과 북을 잡고 더욱 급히 싸움을 독촉하니, 왜적의 배는 크게 패하여 대포에 의해 부서지거나 갈구리에 걸려 침몰된 수를 헤아릴 수 없었다.”(은봉전서 권7 노량기사(露梁記事) 중에서)
이순신 대신 북채를 들고 해전을 지휘한 이는 송희립이었다. 이러한 전공으로 송희립은 이순신에 이어 전라좌수사에 오르게 된다. 여산 송씨의 문중서원인 고흥 재동서원에는 송희립과 형 송대립의 위패가 나란히 모셔져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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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선배 제독이 작전참모로…고흥 ‘정걸’
팔순의 백전노장 정걸(1514~1597) 장군은 이순신보다 31세가 많았고, 20여년 전 경상·전라 수군절도사를 지낸 제독이었다. 그런 그가 임진왜란 때에는 이순신의 조방장, 즉 작전참모로 활약했다.
모든 관직을 은퇴하고 고향 고흥에 살고 있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이순신 휘하에 들어갔다. 해전 경험이 없었던 이순신은 노련한 백전노장이 필요했고, 그는 기꺼이 전라좌수군의 스승 역할을 했다. 이순신은 그를 ‘영공(令公)’이라 칭하며 존중했다. 난중일기에는 이순신이 정걸과 함께 이야기를 나누었다는 기록이 무려 29번이나 나온다. 경험이 풍부한 정걸의 활약을 가늠할만하다.
그는 임진왜란이 일어나기 30~40년 전, 배 위에서 대포를 쏠 수 있도록 설계한 ‘판옥선’을 개발한 장본인이다. 판옥선은 임진왜란 당시 대표적 싸움배였다.
임진왜란 다음해 조정은 이순신의 조방장 정걸을 충청수사로 임명했다. 여든에 가까운 노장에게 다시 벼슬을 준 것이다. 1593년 행주대첩에서 정걸은 결정적인 역할을 하게 된다. 10배 많은 왜군을 맞아 행주산성의 조선 육군은 적의 공격을 하루에 7차례나 막아냈으나 전투 막바지 화살이 떨어졌다. 행주산성이 적에게 함락당할 위기에 처하자 부녀자들은 치마를 짧게 잘라 돌멩이를 날라 던지며 저항했지만 역부족이었다. 절체절명의 위기에 처한 행주산성이었는데, 한강을 건너 노을 속으로 배 2척이 건너오고 있었다. 그 배에는 화살이 가득 실려 있었다. 충청수사 정걸이 보내준 화살이었고, 조선 육군은 빛나는 전과를 거뒀다. 행주대첩이다.
이후 한강 방어선 구축 등 전란 극복에 온 힘을 다하던 정걸은 전쟁이 끝나기 1년 전 83세를 일기로 생을 마쳤다.자신보다 나이가 서른 살이나 많은 사람에게 손을 내밀었던 이순신의 열린 마음과, 기꺼이 그의 부하가 되어 준 30년 선배 정걸 장군으로 인해, 조선 수군은 아무도 넘볼 수 없는 힘을 갖게 됐다.
아들 정연과 손자 정홍록도 임란 의병으로 싸우다가 순절했다. 난중일기에는 정걸 장군의 3대가 등장한다. 전라도 영웅임에도 불구하고 정걸 장군을 모시는 사당이 따로 없다. 관리가 되지않아 잡초와 거미줄만이 뒤엉킨 문중서원 고흥 안동사가 서글퍼진다. 지난 2015년 고흥에 주둔하고 있는 31사단 예하 향토부대는 정걸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자 부대명칭을 ‘정걸대대’로 변경했다.
/순천·고흥=글·사진 박정욱 기자 jwpark@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