며칠 전 영광에서 국제 학술대회가 열렸었다. 수은(睡隱) 강항(姜沆)(1567∼1618) 선생의 학덕(學德)을 기리고 또 그분의 애국 충절과 높은 기개를 찬양하기 위해서 열린 학회였다. 일본에서 ‘수은 강항 선생 연구회장’인 무라까미 쓰네오(村上恒夫) 씨가 참석하고, 국내에선 김덕진·안동교 교수 등이 함께하여 학술 발표와 열띤 토론이 전개된 매우 의미 깊은 학술 대회였다. ‘수은 강항 선생 기념사업회’의 책임을 맡고 있는 터여서 바쁜 일정을 쪼개 그 학회에 참가한 나는 나름대로는 수은 선생에 대해서 일반인들보다는 조금은 더 아는 처지라고 생각해 왔었다. 하나, 그곳에서 발표하는 내용을 들으면서 많은 것을 모르고 지냈다는 생각이 들었다.

우선 일본의 학자들이 그렇게 크고 높게 수은을 숭모하고 있다는 사실을 알았고, 또 17세기를 대표하는 호남의 학자들은 대부분이 강항의 제자들이거나 그분과 교유를 했던 분들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수은의 제자들이 그처럼 기라성 같은 사람들이라는 것도 처음 알게 되었다. 보성의 우산 안방준(安邦俊:1573∼1654)은 수은과 우계 성혼의 동문생으로 가깝게 지낸 후배였으며, 수은의 제자로 명곡 오희도(吳希道:1584∼1624), 거오재 양만용(梁曼容:1598∼1651), 소은 신천익(愼天翊:1592∼1661) 등 17세기의 거물 벼슬아치나 학자들이 모두 수은의 제자로서 학문적 영향을 받아 그만한 성과를 이룩한 인물들이었음을 알게 되었다. 오희도와 양만용은 문과에 급제하여 한림학사로 조선에서 이름을 날린 분들이고 신천익은 문과에 급제하여 참판의 지위에 오른 거물 관인이었다.

수은이 영광에 살았을 때 안방준은 보성, 오희도는 나주와 창평에서 살았고, 양만용은 광주에서 살았으며, 신천익은 영암에서 살았다. 전라도 전역에 수은의 영향이 미치고 있었음을 알게 된다. 그뿐이 아니다. 전라도를 넘어 충청도의 파평 윤씨 가문의 학자들이 온통 수은의 제자였음은 이미 알고 있던 사실이었다. 팔송 윤황(尹煌:1571∼1639)은 우계 성혼의 사위로 미촌 윤선거의 아버지요, 명재 윤증의 조부로 병자호란 때 척화파의 대표적 인물로 국중에 명망이 높던 학자이자 관인이었다. 그가 한때 영광 군수로 재직하면서 장자 윤훈거와 차자 윤순거(尹舜擧:1596∼1668) 등을 수은의 문하에서 학문을 익히도록 하여 윤순거는 바로 수은의 수제자가 되었다. 윤순거는 수은의 ‘간양록’을 간행하면서 친구인 우암 송시열의 서문을 받고, 시남(市南) 유계(兪棨)의 발문을 받았으며, 자신이 수은의 ‘행장’을 저술하여 그의 위대한 삶과 높은 학문 세계를 유감없이 세상에 전해 주었다. 윤순거는 ‘수은집’(睡隱集)이라는 문집까지 간행하여 수은의 학문적 업적이 후세에 전해질 수 있는 큰 업적을 이룩하기도 했다.

1597년 정유재란에 의병을 일으켜 싸우다가 패하여 고향 영광으로 내려온 수은은 쳐들어오는 왜군을 피하여 배를 타고 가족과 함께 피난하다가 통째로 왜군에게 붙들려 왜군의 포로가 되는 신세가 되었다. 문과에 급제하여 여러 벼슬을 지낸 수은은 우계 성혼 문하에서 성리학까지 익혀 당대의 학자 반열에 올랐었다. 그러나 포로 신세로 왜군에게 갇힌 그는 수차례 탈출을 시도하고, 자결하려 물에 투신했지만 끝내 죽지 못했고, 단식으로 생을 마치려 했으나 그것도 뜻대로 되지 못했다. 1600년 간난신고를 거치고 마침내 귀국하여 여생을 학문에 힘쓰며 고향에 은거하여 수많은 제자들을 양성하였다.

특기할 사항은 성리학자 수은이 일본 억류 중 그곳에서 성리학을 일본인들에게 가르쳐주었다는 사실이다. 이는 일본에 주자학이자 성리학을 전파한 일로서 세계사적인 의미를 지닌다. 일본 주자학의 대가인 후지와라 세이카(藤原惺窩:1561∼1619)와 아카마쓰 히로미치(赤松廣通:1562∼1600) 등 학자들에게 큰 영향을 주어 그들이 일본의 주자학 연구에 선구적인 역할을 하게 되었다. 때문에 지금 일본의 오주현에는 ‘홍유 강항 현창비’(鴻儒姜沆顯彰碑)가 세워져 수은의 업적을 기리고 있고, ‘수은 강항 연구회’가 조직되어 무라까미 쓰네오씨가 회장으로 연구회를 이끌고 있다.

400년 전에 일본에서 포로 생활을 하던 수은은 ‘간양록’이라는 특이한 책을 저술하였다. 일본의 내부 사정을 소개한 대단한 책이다. 이제라도 우리역시 수은에 대해 연구하고, 간양록을 읽는 후학들도 많이 나오기를 기대해 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