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시대의 기록인 ‘국조보감’은 역대 임금들의 선정(善政)을 기록한 책이다. ‘선묘보감’은 그 가운데 선조 때의 내용을 담았다. “임진왜란 때 나라의 뜻에 따라 의병들이 일어났으니, 의병의 소리만 듣고 감동받아 멀고 가까운 곳에서 모여들었다. 비록 큰 전공을 이루지 못한 경우도 있으나 백성들의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라의 운명 또한 그들에 대한 믿음으로 유지되었으니, 가장 먼저 의병을 일으킨 사람은 호남의 김천일·고경명(高敬命), 영남의 곽재우(郭再祐), 호서의 조헌(趙憲)이었다”라고 기록하여 임진 의병장으로 대표적인 4인을 들고 있다. 바로 학자 의병장이었다.

그 당시 참으로 많은 의병장들이 활동하였고 수많은 백성들이 의병에 가담하여 나라를 지키느라 자신을 희생하며 의병장들을 따라 왜적과 싸우는 전쟁을 치렀다. 6·25 이전의 가장 큰 전쟁은 바로 임진왜란이었으니, 그런 큰 전쟁에서 의병장으로 네 분의 공적이 가장 컸다고 칭찬한다면, 역시 그분들 모두는 위대한 업적을 남긴 분들임에 분명하다. 그 네 분들이야 모두 전쟁터에서 초개와 같이 목숨을 바친 분들이어서 전쟁이 끝난 뒤에 국가에서는 후한 포상을 내리고 큰 공로에 상응하는 은전을 베풀기도 하였다.

조선 시대에 국가에 공이 큰 학자나 정치가·애국자들의 업적을 현양하는 일로는 사후에 나라에서 시호(諡號)를 추증하는 것이 있었다. 다행스럽게 위의 네 분 의병장들은 업적에 합당한 시호를 하사받았으니, 건재 김천일은 문열(文烈)공, 중봉 조헌 또한 문열공이며 제봉 고경명은 충렬(忠烈)공, 망우당 곽재우는 충익(忠翼)공으로 혁혁한 의병장의 공적을 나름대로 포상했다고 여겨진다. 여기서 살펴볼 일의 하나는 문(文)과 충(忠)은 시호로는 최고의 수준이지만, 문자(文字)의 시호는 반드시 대학자가 아니고는 거의 내릴 수 없는 시호였다.

조선의 대표적 학자인 퇴계는 문순(文純), 율곡은 문성(文成)이었다. 그런 정도의 큰 학자가 아니면 ‘문’의 시호는 내려지지 않았다. 그런데 율곡의 수제자급인 조헌은 문묘에 배향되어 조선 18현의 한 분으로 추대되었는데, 왜 김천일은 똑같은 문열공이면서 세상에서 그렇게 알아주지도 않고 있단 말인가.

호남의 학자로서 문경(文敬)공 이항(李恒), 문정(文正)공 김인후, 문절(文節)공 유희춘, 문헌(文憲)공 기대승, 문효(文孝)공 노진, 문열공 김천일이 대표적인 학자로서 만인의 숭앙을 받는 것은 세상이 다 아는 일인데, 유독 이 중에서 김천일의 명성이 이렇게 알려지지 않음은 어떤 이유일까. 건재 선생은 진주성 싸움에서 아들 김상건(金象乾)과 함께 남강에 투신하여 순국하였고, 둘째 상곤(象坤)은 명이 짧아 일찍 세상을 떠났다. 그래서인지 선생의 유문이 거의 보존되지 못해, 학문적 업적을 세상에 전할 수 없는 입장이었다. 그로 인해 그분에 대한 연구와 현양이 제대로 이뤄지지 못했다는 이유가 가장 크다 할 것이다.

조선 말기인 고종(高宗) 때에야 호남의 대학자 노사 기정진(奇正鎭)과 그의 손자이자 학자·의병장인 송사 기우만(奇宇萬)이 힘을 합하여 ‘건재선생문집’(健齋先生文集)이라는 책을 아주 빈약하게 간행하기에 이른다. 노사는 서문을 짓고, 송사는 발문을 지었는데 이들 조손(祖孫)의 노력으로라도 그나마 문집이 전해지고 있으니 얼마나 다행한 일인가.

애초에 김천일은 일재 이항이라는 대학자의 문인이었다. 뒤에 김인후·기대승·박순·유희춘 등에게도 학문을 물었으며 중앙의 율곡 이이와 유계 성혼 등과도 친구로 사귀면서 큰 학자의 지위에 올랐다. 그래서 호남의 학통을 말하면서 큰 학자로 대제학에 올랐던 택당 이식(李植)은 “호남의 상도에는 일재 이항, 하도에는 고봉 기대승의 학자가 있는데 유독 김천일만이 일재 이항의 학통을 이었다”라고 말하여 김천일을 대학자의 한 분으로 자리매김하였다.

그렇게 많은 임진 의병장에서 오직 조헌과 동격인 문열의 시호를 받은 김천일을 한갓 의병을 일으킨 장군으로만 기억하다가 이제는 후손마저 번성하지 못해 의병장으로서의 큰 추앙도 받지 못하고 학자로서의 대접은 깡그리 사라져 버렸으니, 이런 안타까운 일을 어떻게 해야 할 것인가. 다행히 근래에 언양 김씨 대종회에서 ‘건재선생문집’이 번역되었다니, 지금이라도 고향인 나주시에서 그분의 현양 사업에 노력해 줄 것을 기대해 본다.



※ 이 칼럼은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