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남도,시간속을 걷다] <7> 목포 근대 역사의 거리
2017년 04월 13일(목) 00:00 가가
르네상스식 건축·일본식 건물 … 3·1 만세 소리 들렸어라


1900년 신축된 일본영사관은 목포시청 등을 거쳐 2014년부터 목포근대역사관 1관으로 사용중이다. 지난해 4월 일제 통제의 상징적 공간이었던 영사관 건물 앞에 ‘목포 평화의 소녀상’이 세워졌다.
한달 전 ‘남도, 시간 속을 걷다’ 취재를 위해 오랜만에 목포를 찾았을 때 궁금한 게 있었다. 유달산 자락의 ‘붉은 건물’이었다. 목포근대역사관으로, 예전엔 일본 영사관이었다는 설명을 들었다. 기회가 되면 목포에 흩어져 있는 근대문화유산 흔적을 찾아 차분히 발걸음을 옮겨보는 것도 좋겠다 생각했다.
지난 7일 도착한 목포는 온통 노란색 물결이었다. 눈부신 개나리가 환한 꽃망울을 터트리고,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는 세월호 플래카드가 거리마다 나부끼고 있었다. 이번 취재에는 베테랑 문화해설가 조대형 씨가 길라잡이가 돼 주었다. 긴 시간 함께 걸으며 목포에 대해, 근대 건축물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목포는 1897년 10월 1일 개항했다. 부산, 원산, 인천에 이은 4번째로, 올해 개항 120주년을 맞는다. 근대 건축물 여행의 출발점은 목포근대역사관 2관(전남도 기념물 174호)이다. 일본이 한국 경제를 독점하기 위해 설립한 동양척식주식회사 목포지점이 있던 자리로 지난 1921년 문을 열었다. 일제 강점기 수탈의 심장부였던 이곳은 해방 후 해군 목포 경비부대, 목포 해역사 헌병대로 사용되다 10년간 방치됐었고 2006년 목포근대역사관으로 문을 열었다.
육중한 2층 석조 건물로 ‘사진으로 보는 목포의 옛모습’, ‘일제 참략사’를 주제로한 전시를 진행중이다. 1층에는 동양척식주식회사가 사용하던 금고의 흔적이 그대로 남아 있으며 입구엔 창구 역할을 했던 대리석 카운터도 만날 수 있다.
역사관을 나오면 바로 만나는 공간이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가옥이다. 다양한 수종을 자랑하는 정원이 인상적인 곳으로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으며 목포를 찾는 이들이 한번쯤 들러보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앞에는 일본 거류민들이 다녔던 ‘목포 일본 기독교회’의 흔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5분 쯤 걸어 궁금했던 ‘목포근대역사관 1관’(국가 사적 제289호)으로 향했다. 1900년 건립한 일본영사관 건물로 르네상스 건축양식을 차용했다. 해방 후에는 목포시청, 목포시립도서관, 목포문화원 등으로 사용되다 지난 2014년부터 근대역사관 1관으로 변신했다.
역사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전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다. ‘목포 평화의 소녀상’이다. 목포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4월 8일을 기념해 지난해 4월 8일 세운 것으로 목포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금해 세운 소녀상이 바로 일제 통치의 상징적 공간인 옛 일본영사관 바로 아래 자리잡은 게 의미심장하다. 당신들의 잘못을 깨달으라는 준엄한 꾸짖음같다.
역사관 붉은 벽돌 2층 건물은 태양과 벚꽃 문양 등 일본을 상징하는 장식들로 치장돼 있다. 건물 외벽에는 4개의 총탄 자국이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6·25 당시 북한군 아지트였던 이곳에 미군이 기총 소사를 했다고 한다. 건물 내부에는 당시 집 한채 값에 달했던 러시아풍 벽난로 9개(일부는 복원)를 비롯해 옛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건물 뒤편에는 ‘방공호’가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대규모 방공호를 만들어 취사 시설과 공기 정화 시설까지 마련하고 장기전에 대비했었다. 방공호 안으로 들어서자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든다.
건물 정문 앞에서 목포 시내를 바라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영사관이 자리한 곳은 목포를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한눈에 보이는 절묘한 위치였다. 바다가 보이고, 어디 하나 막힌 데 없는 사통팔달의 도로망을 앞에 둔,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위세가 느껴졌다.
목포 구 도심의 핵심인 ‘목포 오거리’로 발길을 옮긴다. 오거리는 목포역과 관청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특히 갤러리가 없던 시절 이곳에 위치했던 많은 다방들은 전시회 등이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예술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오거리에서 흥미로운 공간은 옛 ‘동본원사 목포별원’(등록문화재 제340호)이다. 한눈에 봐도 ‘일본풍’이 물씬 풍기는 이곳은 일본 사찰이 교회로 사용된 재미난 역사를 갖고 있는 공간이다. 목포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 사원으로 정식 이름은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 당초 목조 건물이었던 것을 1930년대(추정) 현재의 형태로 신축했다. 1957년부터 2007년까지 목포 중앙교회가 사용했고 지금은 전시 등이 열리는 오거리 문화센터가 됐다.
바로 옆은 그 유명한 코롬방 제과점이다. 1949년 문을 연 빵집으로 이곳의 대표 아이템인 치즈 바케트와 함께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른다.
10분 거리에 위치한 ‘남교소극장’(등록문화재 제43호)은 일제 강점기 목포 청년들의 항일 운동 근거지이자 잡지 ‘조선청년’을 발행했던 옛 목포 청년회관이다. 이후 임마누엘 목포 제일교회가 사용하다 시가 매입, 2011년부터 소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연극 준비가 한창인 소극장은 널찍한 공간으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얕은 언덕 위에 자리한 양동교회는 1910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이 목포 지역 최초의 교회로 설립한 양동 교회 본당으로 1919년 4월 8일 목포의 3·1운동을 계획하고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교회 건물은 유달산에서 실어온 석재로 만들었으며 앞 쪽에 돌출된 부분은 이후 신축했다.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 좌우에 따로 있었고, 왼쪽 출입문 위쪽에 태극 문양과 ‘대한융희4년(大韓隆熙四年)’이라 음각한 글이 눈길을 끈다.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의료사업과 함께 교육 사업도 펼쳤다. 영흥학교와 정명여중고가 대표적이다. 교회 인근에 위치한 정명여중고는 1903년 목포여학교에서 출발, 1911년 정명여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교회에서 정명여중고로 가는 길, 유달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했다. 해설사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본다. 좀 더 걷자 정명여고 출신인 전남대 박승희 열사 추모비가 보인다. 정명여중고 교문 바로 옆 돌계단을 오르자 아름드리 나무들 아래 편안한 휴식 공간이 반긴다. 바로 옆엔 정명여학교 시절 옛 선교사 사택(등록문화재 제62호·1905년 께 건립 추정)이 고풍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양림동에서 볼 수 있는 선교사 사택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지금은 정명100주년 기념관과 음악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번 여행길에 역사적인 공간 위주로 둘러봤지만 목포 곳곳엔 현재도 살림집, 상가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다.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그 공간들에선 세월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진다.
시청 관광과로 문의하면 해설사와 동행할 수 있으며 근대역사문화관 2관에 가면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역사관은 월요일 휴관이다.
/글·사진=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
지난 7일 도착한 목포는 온통 노란색 물결이었다. 눈부신 개나리가 환한 꽃망울을 터트리고, ‘당신들을 잊지 않겠다’는 세월호 플래카드가 거리마다 나부끼고 있었다. 이번 취재에는 베테랑 문화해설가 조대형 씨가 길라잡이가 돼 주었다. 긴 시간 함께 걸으며 목포에 대해, 근대 건축물 등에 대한 많은 이야기를 들려줬다.
역사관을 나오면 바로 만나는 공간이 1920년대 지어진 것으로 추정되는 일본식 가옥이다. 다양한 수종을 자랑하는 정원이 인상적인 곳으로 지금은 카페로 운영되고 있으며 목포를 찾는 이들이 한번쯤 들러보는 곳이기도 하다. 바로 앞에는 일본 거류민들이 다녔던 ‘목포 일본 기독교회’의 흔적도 어렴풋이 남아 있다.
역사관으로 향하는 계단을 오르기 전 눈길을 사로잡는 게 있다. ‘목포 평화의 소녀상’이다. 목포에서 만세 운동이 일어났던 4월 8일을 기념해 지난해 4월 8일 세운 것으로 목포 시민들이 십시일반 모금해 세운 소녀상이 바로 일제 통치의 상징적 공간인 옛 일본영사관 바로 아래 자리잡은 게 의미심장하다. 당신들의 잘못을 깨달으라는 준엄한 꾸짖음같다.
역사관 붉은 벽돌 2층 건물은 태양과 벚꽃 문양 등 일본을 상징하는 장식들로 치장돼 있다. 건물 외벽에는 4개의 총탄 자국이 있었다. 설명에 따르면 6·25 당시 북한군 아지트였던 이곳에 미군이 기총 소사를 했다고 한다. 건물 내부에는 당시 집 한채 값에 달했던 러시아풍 벽난로 9개(일부는 복원)를 비롯해 옛 흔적이 많이 남아 있다.
건물 뒤편에는 ‘방공호’가 있다. 일본은 태평양 전쟁 당시 대규모 방공호를 만들어 취사 시설과 공기 정화 시설까지 마련하고 장기전에 대비했었다. 방공호 안으로 들어서자 왠지 섬뜩한 기분이 든다.
건물 정문 앞에서 목포 시내를 바라보며 묘한 기분에 사로잡혔다. 영사관이 자리한 곳은 목포를 장악하고자 하는 의도가 한눈에 보이는 절묘한 위치였다. 바다가 보이고, 어디 하나 막힌 데 없는 사통팔달의 도로망을 앞에 둔, 높은 언덕에 자리잡고 있어 위세가 느껴졌다.
목포 구 도심의 핵심인 ‘목포 오거리’로 발길을 옮긴다. 오거리는 목포역과 관청 등이 즐비했던 곳이다. 특히 갤러리가 없던 시절 이곳에 위치했던 많은 다방들은 전시회 등이 열리는 문화공간으로 예술인들의 아지트이기도 했다.
오거리에서 흥미로운 공간은 옛 ‘동본원사 목포별원’(등록문화재 제340호)이다. 한눈에 봐도 ‘일본풍’이 물씬 풍기는 이곳은 일본 사찰이 교회로 사용된 재미난 역사를 갖고 있는 공간이다. 목포에 세워진 최초의 불교 사원으로 정식 이름은 ‘진종 대곡파 동본원사’. 당초 목조 건물이었던 것을 1930년대(추정) 현재의 형태로 신축했다. 1957년부터 2007년까지 목포 중앙교회가 사용했고 지금은 전시 등이 열리는 오거리 문화센터가 됐다.
바로 옆은 그 유명한 코롬방 제과점이다. 1949년 문을 연 빵집으로 이곳의 대표 아이템인 치즈 바케트와 함께 커피 한잔을 마시며 잠시 숨을 고른다.
10분 거리에 위치한 ‘남교소극장’(등록문화재 제43호)은 일제 강점기 목포 청년들의 항일 운동 근거지이자 잡지 ‘조선청년’을 발행했던 옛 목포 청년회관이다. 이후 임마누엘 목포 제일교회가 사용하다 시가 매입, 2011년부터 소극장으로 운영되고 있다. 연극 준비가 한창인 소극장은 널찍한 공간으로 다양한 장르의 공연을 하기에 적합해 보인다.
얕은 언덕 위에 자리한 양동교회는 1910년 미국 남장로교 선교사 유진벨이 목포 지역 최초의 교회로 설립한 양동 교회 본당으로 1919년 4월 8일 목포의 3·1운동을 계획하고 만세 시위를 이끌었던 ‘역사적 장소’이기도 하다.
교회 건물은 유달산에서 실어온 석재로 만들었으며 앞 쪽에 돌출된 부분은 이후 신축했다. 남자 신도와 여자 신도들이 드나드는 문이 좌우에 따로 있었고, 왼쪽 출입문 위쪽에 태극 문양과 ‘대한융희4년(大韓隆熙四年)’이라 음각한 글이 눈길을 끈다.
남장로교 한국선교회는 의료사업과 함께 교육 사업도 펼쳤다. 영흥학교와 정명여중고가 대표적이다. 교회 인근에 위치한 정명여중고는 1903년 목포여학교에서 출발, 1911년 정명여학교로 이름을 바꿨다.
교회에서 정명여중고로 가는 길, 유달산의 아름다운 모습을 한눈에 볼 수 있다고 했다. 해설사의 말을 듣고 뒤를 돌아본다. 좀 더 걷자 정명여고 출신인 전남대 박승희 열사 추모비가 보인다. 정명여중고 교문 바로 옆 돌계단을 오르자 아름드리 나무들 아래 편안한 휴식 공간이 반긴다. 바로 옆엔 정명여학교 시절 옛 선교사 사택(등록문화재 제62호·1905년 께 건립 추정)이 고풍스런 모습을 드러낸다. 양림동에서 볼 수 있는 선교사 사택들과는 또 다른 느낌이다. 지금은 정명100주년 기념관과 음악실로 사용하고 있다.
이번 여행길에 역사적인 공간 위주로 둘러봤지만 목포 곳곳엔 현재도 살림집, 상가 등으로 사용되고 있는 오래된 건물들이 많다. 길을 걷다보면 자연스레 만나게 되는 그 공간들에선 세월의 흐름이 그대로 느껴진다.
시청 관광과로 문의하면 해설사와 동행할 수 있으며 근대역사문화관 2관에 가면 해설사가 상주하고 있다. 역사관은 월요일 휴관이다.
/글·사진=김미은기자 mekim@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