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발장을 열면서
2017년 02월 13일(월) 00:00 가가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
“아휴! 무슨 남자 신발이 여자보다 더 많아! 안 신는 것은 좀 버려!” 신발장을 열어 본 아내가 한 소리를 한다. 얼마 전에 선물 받은 트레킹화 때문에 신발장이 더 빼곡해졌다. 사실 내 신발이 많기는 하다. 운동화, 정장 구두, 끈 없는 로퍼, 등산화, 여러 개의 트레킹 신발 등등. 몇 년 전부터 걷기에 재미가 들리다 보니 자연스럽게 걷기 용도의 신발이 많아졌다.
정신과 의사이다 보니 사람들이 자주 묻는 질문이 있다. “정신과 의사들은 스트레스를 어떻게 풉니까?” 나는 단연코 ‘걷기’이다. 돌아보면 초등학교 시절부터 뭔가 안 좋은 일이 있으면 걸었다. 목적지는 따로 없었다. 그냥 발길 닿는 대로 걸었다. 주변의 풍경을 두리번거리면서 낯선 동네까지 갔다가 돌아오는 것이었다. 그렇게 걷다 보면 왠지 답답한 마음이 좀 풀리곤 했다.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거의 걷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리고, 일에 치이다 보니 늘 시간에 쫓겼다. 걷기보다는 운전을 했다. 신발장을 열면 구두밖에 없었다. 그렇게 걷기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맛을 붙였다. 집 근처에 흙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 긴 것이다. 점점 걷기에 재미가 들려 전국의 걷기 좋은 길은 찾아서 다녀오기도 한다. 마치 새로운 음식을 먹듯이 새로운 길을 음미하고 오는 것이다.
돌아보면 20대에는 길의 맛을 전혀 몰랐다. 그 시절에는 걷고 싶으면 산을 찾았다. 사실 걷기라기보다는 정상을 밟고 오는 등산이었다. 산이 좋아서라기보다는 ‘극기’(克己)의 한 방법으로 산에 갔었다. 나 자신이 나태하거나 실망스러운 일이 있으면 산을 찾은 것이다. 뭔가 자극을 주고 싶었고, 나를 넘어서고 싶은 마음이 있었다.
그 기준은 시간 단축이었다. 지리산이라면 종주하는 데 총 얼마나 시간이 걸리느냐가 나에게는 중요했다. 그러니 주변의 풍광이 눈에 들어올 리가 없었다. 그냥 발밑만 보고 헉헉거리며 올라갔다. 정상을 향해 오르는 길에 내리막이 나타나면 그렇게 허탈할 수가 없었다. ‘고생해서 여기까지 올라왔는데 다시 내려가라고!’ 내리막길이란 등산의 한 과정이 아니라 정상 정복의 방해물이었다. 마치 애써서 번 돈을 까먹는 느낌이었다.
그러다가 한 번은 사달이 벌어졌다. 제대로 준비 없이 지리산 야간 산행을 하다가 길을 잃고 만 것이다. 밤새 헤매다가 거의 탈진하다시피 쓰러졌다. 바위틈에 잠시 눈을 붙이고 가까스로 천왕봉을 거쳐 내려왔다. 하산 길이지만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내려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 이후로 더 이상 기록 단축이라는 목표를 세워 산에 가지는 않았다. 이후 주변의 풍광을 즐기고 길의 맛을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등산보다는 트레킹을 주로 다닌다. 트레킹은 ‘정상’(頂上)이라는 개념이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길 주변의 풍광을 즐길 뿐이다. 그 여유로운 걷기가 좋다. 그러다 한 번씩 가벼운 등산을 간다. 너무 편한 길만 걷다 보면 등산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매콤한 맛, 신 맛, 쓴 맛이 들어가야 음식의 맛이 깊어지는 것처럼 굴곡이 심한 산길이 좋게 느껴질 때가 있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난 뒤에 정상에서 느끼는 탁 트인 개방감! 그것은 일상의 길에서 맛 볼 수 없는 별미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20대의 등산과는 다르다. 오르막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내리막이 나타나더라도 허탈해하지 않는다. 앞만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옆도 보고 뒤도 보며 걷는다. 쉬고 싶을 때 쉬고, 걷고 싶을 때 걷는다. 그 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는다.
우리의 삶 역시 다양한 길이 있다. 사람들에게 떠밀리듯 걸어야 하는 복잡한 도심의 길도 있고, 정상을 넘어야 하는 험한 등산로 같은 길이 있고, 자연 속의 아름다운 둘레길 같은 여유로운 길도 있다. 꼭 이것이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나눌 필요도 없다. 인생이란 수없이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그리고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길을 판단하고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길을 받아들이고 잘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신발을 정리하라는 아내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로 신발장 문을 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합리화한다. ‘이 다양한 길을 걷기 위해서는 다 필요한 신발이라고!’
그런데 결혼을 하고 난 뒤에는 거의 걷지 못했다. 아이들이 어리고, 일에 치이다 보니 늘 시간에 쫓겼다. 걷기보다는 운전을 했다. 신발장을 열면 구두밖에 없었다. 그렇게 걷기를 까맣게 잊고 있다가 몇 년 전부터 다시 맛을 붙였다. 집 근처에 흙을 밟으며 걸을 수 있는 길이 긴 것이다. 점점 걷기에 재미가 들려 전국의 걷기 좋은 길은 찾아서 다녀오기도 한다. 마치 새로운 음식을 먹듯이 새로운 길을 음미하고 오는 것이다.
그러다가 한 번은 사달이 벌어졌다. 제대로 준비 없이 지리산 야간 산행을 하다가 길을 잃고 만 것이다. 밤새 헤매다가 거의 탈진하다시피 쓰러졌다. 바위틈에 잠시 눈을 붙이고 가까스로 천왕봉을 거쳐 내려왔다. 하산 길이지만 몸은 천근만근 무거웠다. 내려오는 길에 자꾸 눈물이 났다. ‘내가 왜 이러고 있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 일 이후로 더 이상 기록 단축이라는 목표를 세워 산에 가지는 않았다. 이후 주변의 풍광을 즐기고 길의 맛을 느끼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이제는 등산보다는 트레킹을 주로 다닌다. 트레킹은 ‘정상’(頂上)이라는 개념이 없다. 주어진 시간 안에 길 주변의 풍광을 즐길 뿐이다. 그 여유로운 걷기가 좋다. 그러다 한 번씩 가벼운 등산을 간다. 너무 편한 길만 걷다 보면 등산이 그리울 때가 있다. 매콤한 맛, 신 맛, 쓴 맛이 들어가야 음식의 맛이 깊어지는 것처럼 굴곡이 심한 산길이 좋게 느껴질 때가 있다. 땀을 흠뻑 흘리고 난 뒤에 정상에서 느끼는 탁 트인 개방감! 그것은 일상의 길에서 맛 볼 수 없는 별미 아닌가!
그러나 지금은 20대의 등산과는 다르다. 오르막에서는 무리하지 않고, 내리막이 나타나더라도 허탈해하지 않는다. 앞만 보고 걷는 것이 아니라 옆도 보고 뒤도 보며 걷는다. 쉬고 싶을 때 쉬고, 걷고 싶을 때 걷는다. 그 길의 모든 것을 받아들이고 나에게 맞는 속도를 찾는다.
우리의 삶 역시 다양한 길이 있다. 사람들에게 떠밀리듯 걸어야 하는 복잡한 도심의 길도 있고, 정상을 넘어야 하는 험한 등산로 같은 길이 있고, 자연 속의 아름다운 둘레길 같은 여유로운 길도 있다. 꼭 이것이 좋고 저것은 나쁘다고 나눌 필요도 없다. 인생이란 수없이 많은 봉우리와 골짜기 그리고 완만한 능선으로 이어지는 거대한 산맥과 비슷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길을 판단하고 골라내는 것이 아니라 그 모든 길을 받아들이고 잘 오르내릴 수 있는 것을 배워야 하는 것이다. 신발을 정리하라는 아내의 엄명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대로 신발장 문을 닫는다. 그리고 이렇게 합리화한다. ‘이 다양한 길을 걷기 위해서는 다 필요한 신발이라고!’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