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광룡 시인·계간 문학들 발행인]‘나에게 스며온 너라는 어둠’
2016년 12월 26일(월) 00:00 가가
송태웅 시인은 대학 선배다. 그 시절 형은 군대를 다녀왔고 나는 신입생 티를 못 벗은 처지였다. 하지만 우리는 친구처럼 지냈다. 친구 중에서도 술친구였다. 그만큼 형이 허물없었다는 뜻이겠다. 그런 관계는 내가 군대를 다녀오고 형이 졸업 후 고등학교 선생이 되어서도 지속됐다.
형은 연극, 나는 시 동아리에 적을 두었으나 형이 무대 위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화를 낼지 모르겠으되, 아마도 ‘행인 1’이거나 ‘행인 2’ 정도로 상상할 수는 있겠다. 형은 연극을 무척 사랑했으나 무대 위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나 또한 시를 사랑했으나 시집을 낸 적이 없다, 아니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평생 시의 주위만 맴돈 셈이다.
막걸리 잔을 놓고 그 시절 우리가 앉은 원탁의 범위도 그런 변방의 접경지대쯤이었을 것이다. 하루가 멀다 하고 잔을 부딪치면서 우리는 무슨 얘기를 그렇게 나누었을까. 취기가 무르익어 오줌이 마려울 즈음이면 선수를 친 것은 언제나 형이었다. 벌떡 일어나 아무 말 없이 쪽지 하나를 불쑥 내밀고는 “화장실 갔다 온다”하고 등을 돌렸다.
그 순간, 그러니까 호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쪽지 하나를 내밀면서 매우 겸연쩍어 하던 형의 취한 얼굴만은 지금도 또렷하다. 또렷이 떠오르는 또 한 가지는 몇 줄의 글귀보다도 휘갈겨 쓴 것 같은데 정말 예술적인 형의 필체다. 요즘으로 치면 감탄할 만한 수준의 캘리그래피였고, 옛날로 치면 낙관을 찍어 가보로 보관할 정도의 솜씨였다. 천성인 양 악필인 나는 형의 그런 필체가 무지 부러웠다.
형이 고집이 세고 울컥하는 성정이 있다는 것을 안 것은 내가 세상 물정에 눈을 뜬 시간과 비례한다. ‘전교조’ 파동으로 오랜 시간 학교를 떠났다 복직한 형은 무슨 까닭인지 학교를 그만두었고, 학원 강사로 여러 곳을 떠돌았으며, 이혼을 하였고, 홀로 섬과 뭍을 오가며 ‘보따리 장사’로 연명하더니, 종내는 지리산 속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사이 형은 시인이 되었고 두 번째 시집 ‘파랑 또는 파란’을 내게 보내 주었다. 아무런 수사 없이 ‘송광룡 시인께-○○○’이라고 쓴 멋대가리라곤 잉크 똥만도 못한 헌사가 밥맛없었지만, 예의 그 필체만은 눈부셨다. 그것만으로도 형은 멋진 시인이었다. ‘아직 썽썽하구만!’ 나는 그것만으로도 눈물이 날 것 같았다. 고마웠다. 그리고 나는 시집을 펼쳐 놓고 마침내 울었다.
“나에게 스며온 너라는 어둠/ 너에게 전염되어간 나라는 불치병/ 조금씩 일찍 떠나버리는 버스를 바라보며/ 혼자는 혼자를 만나 드디어 혼자가 된다”(시 ‘혼자’)
기실,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닌가. 인생이라는 게 마음과는 다르게 언제나 한발 ‘일찍 떠나버리는 버스’ 같은 것은 아닌가. 내게 스민 당신의 어둠이거나 나의 의지와는 달리 당신에게 전염돼 버린 ‘나라는 불치병’은 또 어쩔 것인가. 화선지에 물 배듯 내 마음을 적셨다고 말하면 너무 진부한 것인가. 이 짧은 시가 유독 나를 울린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쓴 연시라고 하기엔, 물론 그렇다 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내 혈관에서 몇 방울의 눈물을 밀어 올려 떨구게 했다.
그날 이후, 혹은 그 시절 이후, 나는 누구와 함께했던 것일까. 당신은 누구와 함께했는가. 어떻게 함께하고 있는가. 이것은 관계의 시다. 나에게 당신이 ‘어둠’이 되고, 당신에게 내가 ‘불치병’이 되는 세계, 언제나 ‘조금씩 일찍 떠나버리는 버스’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존재의 시다. 그것이 ‘혼자는 혼자를 만나 드디어 혼자가 된다’는 시구가 슬프면서도 슬프지 않은 이유다.
“내가 가르친 아이는 끝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배달천국에 배달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나도 선생질을 작파하고 산에 오르내리면서 노가다를 뛰고 있을 때였다 배달을 해야 해서 경차 모닝을 샀다고 했다 연말에 내게 놀러온다고 해서 호기롭게 오라고 했다 사제동행이었다 절망 뒤에 희망이 온다는 말은 어른들의 헛된 주문이었다”(시 ‘아직 오지 않은 날’).
이 시의 앞 연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아이는 어느새 늙어 찌든 담배냄새를 풍기며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무뢰한이 될 것이다 그는 누런 웃음을 흘리며 자기의 생 앞에 비굴하게 무릎 꿇을 것이다 누군가 이유 없이 치고 밟아도 헤헤거리며 쓰러져서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길고양이처럼 사라져갈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단독자이니까. 당신도 나도 혼자다. ‘혼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신은 당신으로, 나는 나로 인정한다는 것이니 그날, 당신이 아파서 홀로 울고 있을 때 내가 거기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겠다. 내가 거기 없었으나 당신 생각으로 나도 괴로웠다는 것을 당신도 조금은 인정해 주면 좋겠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달구지에 싣고 가 툭 던져진 꽃들의 유해”(시 ‘별’). 여기까지 쓰니 무슨 신파 같다. 신파라도 괜찮다. 중심이 아닌 변방에 있는 자들에게 외로움은 친구니까. 외로워야 또렷이 보이니까. 나는 나, 너는 너, ‘단 한 번도 실수 없는 배우가 되어’(시 ‘나의 저녁’) 나의 ‘대사’를 내뱉을 수 있는 세계는 없으니까. 당신과 나, 새해에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형은 연극, 나는 시 동아리에 적을 두었으나 형이 무대 위에 오른 적이 있었던가? 화를 낼지 모르겠으되, 아마도 ‘행인 1’이거나 ‘행인 2’ 정도로 상상할 수는 있겠다. 형은 연극을 무척 사랑했으나 무대 위의 주인공은 아니었다. 나 또한 시를 사랑했으나 시집을 낸 적이 없다, 아니 내지 못했다. 그러고 보면 나도 평생 시의 주위만 맴돈 셈이다.
그 순간, 그러니까 호주머니 속에서 구겨진 쪽지 하나를 내밀면서 매우 겸연쩍어 하던 형의 취한 얼굴만은 지금도 또렷하다. 또렷이 떠오르는 또 한 가지는 몇 줄의 글귀보다도 휘갈겨 쓴 것 같은데 정말 예술적인 형의 필체다. 요즘으로 치면 감탄할 만한 수준의 캘리그래피였고, 옛날로 치면 낙관을 찍어 가보로 보관할 정도의 솜씨였다. 천성인 양 악필인 나는 형의 그런 필체가 무지 부러웠다.
“나에게 스며온 너라는 어둠/ 너에게 전염되어간 나라는 불치병/ 조금씩 일찍 떠나버리는 버스를 바라보며/ 혼자는 혼자를 만나 드디어 혼자가 된다”(시 ‘혼자’)
기실, 우리는 모두 혼자가 아닌가. 인생이라는 게 마음과는 다르게 언제나 한발 ‘일찍 떠나버리는 버스’ 같은 것은 아닌가. 내게 스민 당신의 어둠이거나 나의 의지와는 달리 당신에게 전염돼 버린 ‘나라는 불치병’은 또 어쩔 것인가. 화선지에 물 배듯 내 마음을 적셨다고 말하면 너무 진부한 것인가. 이 짧은 시가 유독 나를 울린 이유를 나도 모르겠다. 사랑하는 사람을 두고 쓴 연시라고 하기엔, 물론 그렇다 해도 부족함이 없지만, 알 수 없는 그 무엇인가가 내 혈관에서 몇 방울의 눈물을 밀어 올려 떨구게 했다.
그날 이후, 혹은 그 시절 이후, 나는 누구와 함께했던 것일까. 당신은 누구와 함께했는가. 어떻게 함께하고 있는가. 이것은 관계의 시다. 나에게 당신이 ‘어둠’이 되고, 당신에게 내가 ‘불치병’이 되는 세계, 언제나 ‘조금씩 일찍 떠나버리는 버스’의 세계에서 우리는 어떻게 살 것인가. 이것은 존재의 시다. 그것이 ‘혼자는 혼자를 만나 드디어 혼자가 된다’는 시구가 슬프면서도 슬프지 않은 이유다.
“내가 가르친 아이는 끝내 공무원 시험에 합격하지 못하고 배달천국에 배달 영업사원으로 취직했다 나도 선생질을 작파하고 산에 오르내리면서 노가다를 뛰고 있을 때였다 배달을 해야 해서 경차 모닝을 샀다고 했다 연말에 내게 놀러온다고 해서 호기롭게 오라고 했다 사제동행이었다 절망 뒤에 희망이 온다는 말은 어른들의 헛된 주문이었다”(시 ‘아직 오지 않은 날’).
이 시의 앞 연에는 이런 시구가 있다. “아이는 어느새 늙어 찌든 담배냄새를 풍기며 도시의 뒷골목을 배회하는 무뢰한이 될 것이다 그는 누런 웃음을 흘리며 자기의 생 앞에 비굴하게 무릎 꿇을 것이다 누군가 이유 없이 치고 밟아도 헤헤거리며 쓰러져서 아스팔트에 달라붙은 길고양이처럼 사라져갈 것이다.”
여기서부터 시작해야겠다. 우리는 모두 단독자이니까. 당신도 나도 혼자다. ‘혼자’를 인정한다는 것은 당신은 당신으로, 나는 나로 인정한다는 것이니 그날, 당신이 아파서 홀로 울고 있을 때 내가 거기 없었다는 사실을 나는 인정하겠다. 내가 거기 없었으나 당신 생각으로 나도 괴로웠다는 것을 당신도 조금은 인정해 주면 좋겠다.
“가마니에 둘둘 말아서 달구지에 싣고 가 툭 던져진 꽃들의 유해”(시 ‘별’). 여기까지 쓰니 무슨 신파 같다. 신파라도 괜찮다. 중심이 아닌 변방에 있는 자들에게 외로움은 친구니까. 외로워야 또렷이 보이니까. 나는 나, 너는 너, ‘단 한 번도 실수 없는 배우가 되어’(시 ‘나의 저녁’) 나의 ‘대사’를 내뱉을 수 있는 세계는 없으니까. 당신과 나, 새해에는 여기서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