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부상소(持斧上疏)
2016년 03월 30일(수) 00:00 가가
상소(上疏)는 임금에게 올린 정사에 대한 비판이나 일종의 충언이었다. 절대 권력을 갖고 있는 왕을 견제하고 민의를 전달하는 언로(言路)이기도 했다. 왕은 국사가 아무리 바쁘더라도 잠자리에 들기 전 상소문을 챙겨 읽어야 할 의무가 있었다. 이를 가르켜 밤 9시 이후인 을야(乙夜)에 읽는다고 해 ‘을람’(乙覽)이라고 했다.
상소 중에서도 가장 강력한 것은 지부상소(持斧上疏)다. 도끼를 지닌 채 상소를 한다는 뜻이니 내 말이 틀리면 목을 쳐도 좋다는 결연한 의지가 담겨 있는 것이다.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지부상소를 올린 이는 고려말 충신인 우탁이었다. 우탁은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김씨를 숙비로 봉하자 상복을 입은 채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갔다. 그는 아버지의 후궁을 취한 것은 패륜이라며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면 목을 치라고 간언해 왕을 부끄럽게 했다.
조선시대에는 조헌 선생이 임진왜란 발발 한해 전인 1591년 선조에게 지부상소를 올렸다.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사신을 보내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길을 빌릴 것을 요청하자 일본 사신의 목을 벨 것을 요구하며 사흘간 궁궐 밖에서 도끼를 놓고 시위를 벌였다.
지부상소는 구한말 최익현에 의해 다시 등장했다. 최익현은 1876년 강화도에서 병자수호조약이 체결되자 도끼를 들고 광화문에 나타났다. 그는 일본과의 수호통상조약을 체결해서는 안 될 다섯 가지 이유를 들며 통상조약을 강요한 일본 사신 구로다 교타카의 목을 벨 것을 고종에게 요구했다가 신안 하의도에서 3년간 유배 생활을 해야 했다.
지부상소는 자신의 목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돼야 하겠지만 최근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광주에서 모 정당 예비후보로 나온 한 후보가 경선 결과가 뒤집히자 서울 당사 앞에서 지부상소 파문을 일으켰다. 1주일 만에 광주에 내려와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했지만 씁쓸한 뒷맛은 가시지 않고 있다.
올해 총선은 여당의 옥새 투쟁이니 야당의 지부상소니 해서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욕하면서도 본다지만, 막장 드라마 같은 이런 ‘리얼 정치쇼’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장필수 사회부장 bungy@
우리 역사상 처음으로 지부상소를 올린 이는 고려말 충신인 우탁이었다. 우탁은 충선왕이 아버지 충렬왕의 후궁인 숙창원비 김씨를 숙비로 봉하자 상복을 입은 채 도끼를 들고 대궐로 들어갔다. 그는 아버지의 후궁을 취한 것은 패륜이라며 자신에게 잘못이 있으면 목을 치라고 간언해 왕을 부끄럽게 했다.
지부상소는 자신의 목을 걸고 하는 것인 만큼 최후의 수단으로 사용돼야 하겠지만 최근에는 자신들의 정치적 목적을 위해 남용하는 경향이 있다. 이번 총선을 앞두고 광주에서 모 정당 예비후보로 나온 한 후보가 경선 결과가 뒤집히자 서울 당사 앞에서 지부상소 파문을 일으켰다. 1주일 만에 광주에 내려와 결과에 승복하겠다고 했지만 씁쓸한 뒷맛은 가시지 않고 있다.
올해 총선은 여당의 옥새 투쟁이니 야당의 지부상소니 해서 여느 때보다 소란스러웠다. 욕하면서도 본다지만, 막장 드라마 같은 이런 ‘리얼 정치쇼’는 이제 그만 보고 싶다.
/장필수 사회부장 bungy@