얼마 전 관람했던 영화 ‘역린’은 400여 만명에 이르는 관객 돌파와 시대를 관통해 가르침을 주고 있는 명대사들로 화제를 모았다. ‘역린’은 정조대왕 암살미수사건인 ‘정유역변’이 모티브로, 영화 속에서는 침실 지붕 위의 암살자에 맞선 정조대왕의 무예를 현란하게 보여준다. 역사상 가장 뛰어난 개혁 군주였던 정조대왕은 학문·시·서예·그림에도 능했지만 탁월한 무인이기도 했다. 정조대왕에 빙의된 듯 배우 현빈의 진지한 연기는 드라마 ‘시크릿 가든’에 이어 여성 팬들의 ‘현빈앓이’를 도지게 할 것 같다.

정조대왕의 현군으로서의 자질은 세손시절부터 돋보였다. 세손은 섬돌 앞 파초를 보고 시 한 편을 쓴다. “정원에 고운 봄이 짙어져가니/초록 파초 새잎을 펼치려는데/펼쳐내면 빗자루인 양 커질 것이니/탁물(托物)이란 대인들이 힘준 바였네” 여름날 파초가 무성한 녹음을 이루어 그늘의 시원함을 베풀 듯이 군주가 되면 백성을 위한 선정을 펼치겠다는 다짐이다.

김종서 연세대 국학연구원 전문연구원은 공저 ‘한국학, 그림을 그리다’에서 “시 가운데 탁물(托物)이란 마음이 지향하는 자세를 사물의 속성에 미루는 것으로 정조는 탁물을 파초에 두어 자신의 수양과 지혜의 자료로 삼았다”고 해석한다.

정조대왕은 그 마음을 담아 ‘파초도’(보물 제743호)를 그린다. 몰골법으로 처리된 파초의 줄기, 농담을 달리하면서 먹으로 표현한 널따란 잎새, 잎새의 꼬불꼬불한 윤곽선 등에는 필법과 묵법에 관한 정조대왕의 깊은 터득이 드러나 있어 수작으로 평가받고 있다. 배경 없이 주제만을 부각시킨 시각, 파초와 바위가 이루는 조화와 구성미는 대왕의 수준 높은 회화미를 보여준다.

6·4 지방 선거가 막을 내렸다. 당선자들은 저마다 새로운 변화에 대한 포부와 함께 새 시대 리더를 약속하고 있다. 영화 ‘역린’에서 정조대왕이 ‘중용’을 인용하며 강조한 바 “…세상에서 지극히 정성을 다하는 사람만이 나와 세상을 변하게 할 수 있는 것”이라는 대목이 의미 깊게 새겨지는 때이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 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