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 세월 반짝일세. 내게 더 이상 뭐가 있겄는가. 천상 그림이제. 이제 무엇을 좀 알 만 한 게 가야할 날이 금방이네…”

지난해 늦가을, 방문객들을 배웅하러 현관까지 나선 아산 조방원(1926∼2014)화백. 그날, 이 시대 마지막 남종화의 대가 아산의 모습은 나의 기억 속에 한 그루 고목으로 남아있다. 날이 갈수록 지병으로 야위어갔지만 아산은 노송의 거북 등걸 같은 몸피처럼 불필요한 윤기를 빼버린 단단하고 정정한 기운을 전해주었다. 가야할 곳은 오직 한군데라 했던 아산의 영방(靈房)과 정원 가득한 홍매, 청매, 버들매를 뒤로 하고 돌아서면서 이듬해 봄날을 기약했었다.

부처님을 좋아하므로 불두화(佛頭花) 하얗게 꽃 핀 계절에 세상을 떠난 아산의 삶과 예술은 한 마디로 ‘일생묵노(一生墨奴)’로 집약하고 싶다. 일생 먹과 더불어 살았기 때문이다. 화가로서 일가를 이루면서도 바른 세상 되는 것과 우리 전통문화에 대한 유별난 애정, 평생 수집한 문방사우, 간찰, 대지 등을 기증해 온 청빈함 모두 먹과 함께 가꾸어 온 일생이다.

작품 ‘심곡(深谷)’에는 아산의 생전 모습이 그대로 담겨있다. 계곡을 흐르는 물은 ‘세상에서 가장 선한 것이 물(上善若水)’이라 했던 노자의 사상, 산과 바위의 지극히 깊은 먹의 세계는 불교의 선미, 매화의 향기를 찾아가는 구도자를 통해 도가의 사상을 본다. 작품 속 인물은 그렇게 유불선(儒彿仙)을 추구했던 아산일 것이다. 이제 막 자신의 작품 안으로 한발 한발 걸어갔을 지도 모르겠다.

“내가 산수를 그리는 이유는 좋아서 그리는 것이고, 좋은 산은 들여다보고 있으면 정말 자연 속에 그 산 안에 내가 들어간 것처럼 마음이 편하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