요즘은 ‘너무 많은 책들’이 출간되어 책의 홍수시대라 할 만하다. 나의 경우엔 ‘세계 명작 동화’나 ‘셜록 홈즈 시리즈’ 등 전집 서너 질로 유년을 보냈던 것 같다. 책이 귀했기에 본의 아니게 다독이 아니라 읽었던 책들을 읽고 또 읽었었다.

독일 동화인 그림 형제의 ‘한스와 그레텔’은 지금까지도 강렬한 인상으로 남아있다. 어린 마음에 길을 잃어버릴까하는 두려움으로 한동안 자갈을 보면 반사적으로 주워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싶었던 생각이 겹쳐진다. 가장 압권은 한스와 그레텔이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오리를 타고 강을 건너는 장면이다. 지금도 시골 저수지나 시냇가에서 떼 지어 헤엄치고 있는 오리를 보면 그렇게 예쁘고 반가울 수가 없다. 오리가 있는 풍경이 내겐 아름답고 평화로운 이미지로 연상되기 때문이다.

최근 전국적으로 확산되고 있는 오리, 철새 공포가 안타깝다. 사람에게 병을 옮길 수 있다는 고병원성 조류 인플루엔자의 주범이 되어 살처분 당하고 있는 닭, 오리의 비명이 귓전에 들리는 듯하다. AI의 발생이 어찌 오리 탓이기만 할 것인가?

조선시대 선비화가였던 석창 홍세섭(1832∼1884)의 ‘유압도(遊鴨圖)’를 보면 아픈 마음이 잠시 달래진다. 헤엄치는 두 마리의 오리를 위에서 내려다보는 부감법(俯瞰法)으로 묘사하고 있는데 그 새로운 시각이 유쾌하다. 활기에 넘치는 오리들의 표정, 얼마만큼 따라왔는지 뒤돌아보며 확인해보는 앞 오리의 동그란 눈동자, 힘차게 따라잡으려는 뒷 오리의 유영으로 일렁이는 물결은 그 얼마나 역동적인가?

홍세섭은 사대부이면서도 자연과 생명에 대해 무한한 애정을 갖고 진지하게 관찰했기 때문에 화면의 생생함과 구성력을 획득할 수 있었던 것 같다. 조선 말기 회화사에서 홍세섭은 북산 김수철 등과 함께 전에 보지 못한 참신한 화풍을 창출했다하여 주목할 만한 ‘이색화풍’으로 평가된다.



〈광주비엔날레 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