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 잃은 등산객들 있을 듯/외딴 두메 마을 길 끊어놓을 듯/은하수가 펑펑 쏟아져 날아올 듯 덤벼드는/다투어 몰려오는 힘찬 눈보라의 군단/눈보라가 내리는 백색의 계엄령…”〈최승호 작 ‘대설주의보’중에서〉

새해 벽두부터 칼바람이 차갑다. 기록적인 한파로 세계 곳곳이 얼어붙었다는 뉴스를 접하니 우리들 마음도 더욱 꽁꽁 얼어붙는다. 현재의 기상이변은 시인의 시처럼 단순한 한파주의보가 아니라 ‘백색 계엄령’에 가까운 공포로 여겨진다. 대자연의 위력 앞에 새삼 한없이 작아지는 인간의 모습이 실감난다.

인간은 자연의 거대함에 압도될 때 감동과 경외를 동시에 느끼게 되는 것 같다. 서양미술에서 19세기 낭만주의는 인간을 압도하고 위압하는 자연을 ‘숭고한 대상’으로 재발견한다. 서양미술에서는 대상의 ‘모방과 재현’이 오래도록 중요한 가치였지만 낭만주의에 이르러서 대상을 바라보는 작가 내면의 정서가 적극적으로 표현되기 시작한다. 작가의 감정을 담아내기에 적합했던 풍경화가 이 시기에 절정을 이룬 이유다.

영국 회화의 자존심이라 할 조지프 말러드 윌리암 터너(1775∼1851)는 폭풍, 눈보라, 눈사태, 파도, 대홍수 등 장엄한 자연을 그린 낭만주의 풍경화가로 유명하다. 작품 ‘눈보라’(1842년 작)는 하늘을 뒤덮은 검은 구름과 폭풍우가 휘몰아치며 일어난 눈보라의 소용돌이를 그려 대자연의 위력을 과시한다. 터너는 시각적으로 포착하기 어려운 눈, 바람, 하늘 등 대상의 사실적인 표현 대신 과감한 색채로 대기와 눈보라의 맹렬한 속도감을 표현한다.

영국의 비평가 윌리엄 해즐리트는 “터너의 회화는 화면에서 대상의 윤곽을 해체하고 소멸시켜 버림으로써 이미 추상회화가 되었다”고 찬미하면서 미술사에서의 선구자적 위치를 강조한다. 영국 테이트 브리튼은 1984년 최고 권위의 현대미술상인 ‘터너상’을 제정해 해마다 터너의 뛰어난 예술성을 기리고 있다.

〈광주비엔날레전시부장·미술사박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