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누구인지 말할 자는 누구인가” 이 말은 지난 1990년 이인화가 쓴 글 제목으로 내던져진 인간 존재에 대한 성찰의 물음이다.
이 물음에 대해 2005년 류정식 시인의 첫 시집 발문을 쓰면서 이렇게 말한 일이 있다.
“이 물음은 자기 상실에 대한 철학적 물음이요, 끝없는 미궁에서 드러나는 불안의 징표일 수도 있을 것이고 어쩌면 자기 존재에 대한 불확실성의 확인에서 나타나는 화두(話頭)일 것이다.”
이러한 물음의 실체는 무엇일까? 철학자 야수퍼스는 “인간은 언제나 길 위에 서 있으며 그 도정(道程)이 확실히 드러나지 않는다“고 했다.
만약 이 물음에 답할 수 있는 존재자가 있다면 신(神)일 것인데 안타깝게도 말해주어야 할 신(神)은 침묵하는 존재에 불과하며, 설령 누군가가 믿음과 깨달음으로 이 물음을 깨우쳤다면 그는 이미 인간이 아니므로 그도 마찬가지가 아니겠는가!
그런데 더 큰 문제가 있다. 이러한 인간 존재의 물음조차도 21세기에 접어들면서 흥미를 잃고 말았다. 답이 없는 물음에 시간을 낭비하지 않겠다는 현대인들의 물신주의(物神主義)는 데카르트로부터 시작된 유물사상(唯物思想)의 노예로 전락하고 말았으니 자아상실 그 자체를 논하는 것마저 부질없는 일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이러한 현상은 새로운 해답을 찾아야 할 미학적 주체의 인식마저도 새로운 생활패턴의 틀 속에 가두어져 화석화되어버린 습관적 자아상실이 아닌가 싶다.
기축(己丑)년 초두에 어두운 현실을 화두로 삼는 것은 그 책임소재를 묻자는 것이 아니며, 오늘의 사회현실을 포장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여 줌으로써 새로운 대안을 기대할 수 있어서이다.
여기서 필자가 ‘포장’(包藏)이란 단어를 사용했는 데 포장의 사전적 의미를 떠나서 사실과 거리를 두기 위한 언표(言表)로써 뿐만 아니라 의도적으로 속을 감추기 위한 술수로서 거짓을 말함인데 양식 있는 사람이라면 참을 위해 깨어나 물신주의의 폭력적 사회 형태를 정의로운 비판의식으로 무장해야 한다. 그렇다면, 정의로운 비판적 사고는 어디서 얻어지며 길러지는가? 그 답은 각자가 갖고 있는 정체성, 주체성, 종교성 등에서 얻어지기도 하겠으나 여기에는 주관적 성격이 가하게 작용함으로 자칫 개인 또는 공동체적 최면술에 빠질 수 있음으로 이보다는 허구적이기는 하지만 그 허구성에 인간의 참다운 모습이 용해(溶解)되어 작용하는 다양한 문학작품을 독서라는 행위를 통하여 간접 체험함으로써 사회관계를 객관적 측면에서 이해하고 인간 존재에 대한 바라봄의 폭을 넓힌다면 그 바라봄이 존재의 의미를 부여하게 되는 동기가 될 것이고, 이는 바로 자아상실에서 자아발견으로 전환하는 계기가 되지 않을까!
이제 우리는 자신을 돌아보는 여유를 찾아야 한다. 말초적 쾌락보다 눈으로 읽고, 머리로 판단하고, 가슴으로 느끼는 느림의 입체적 행위에서 진지한 자기 성찰과 이성회복에 눈뜨는 해가 되어야한다.
이수익의 작품에 나타난 혈거인이 되어 자연과 소통하는 즐거움을 느림의 미학에서 한번쯤 짚고 넘어가는 한 해가 됐으면 한다.
/문인호 광주시 문인협회 사무국장