두 얼굴의 법원- 윤영기 사회·체육담당 부국장
2025년 01월 14일(화) 22:00
한홍구 성공회대 교수가 집필한 ‘사법부’에는 이런 대목이 나온다. “80년대 공안사건 법정에서는 피고인이나 방청객들이 던진 신발이 법대를 향해 날아가고, 야유와 아우성과 구호가 터져 나오던 난장판이 일상적으로 벌어졌다. 공소장의 오자까지 베낀 판결문 위에다 독립적인 헌법기관의 판사들은 제 이름 석자를 버젓이 적기도 했다. 이 사회에 만연한 사법부 불신의 기원은 바로 여기서 비롯된다고 할 수 있다.” 세월이 흘렀지만 사법부의 변화에 흔쾌히 동의하기는 쉽지 않을 것 같다.



무기수 김신혜 재심 무죄의 교훈

엊그제 재심 재판에서 무죄를 선고받은 김신혜씨는 2000년 완도에서 아버지를 살해한 혐의 등으로 기소돼 무기수로 24년 10개월을 복역했다. 재판부가 억울함을 호소하는 김씨의 절규에 귀를 기울이고, 공소 내용을 꼼꼼히 살폈더라면 결과는 달라졌을 것이다. 애초 범행을 자백했다가 번복함으로써 판단을 어렵게 했다는 점을 차치하더라도 아쉬운 대목이 적잖다.

대표적인 공소사실의 골자는 수면제 30알을 탄 양주를 마시게 해 아버지를 살해하고 사체를 유기했다는 혐의였다. 재심 재판부는 “수면제 30알을 양주 2잔에 탔다면 농도가 매우 진했을 것인데 이를 피해자가 그냥 마셨을지 의문”이라며 “부검 당시 피해자의 위장에서는 그처럼 많은 양을 복용한 흔적이 발견되지 않았다”고 배척했다. 상식적인 판단으로 간단히 공소사실이 깨진 셈이다. 각종 증거들도 압수수색 영장 없이 임의로 입수한 점이 인정돼 증거에서 배제됐다. 재심 법원이 배척한 위법증거는 원심부터 대법원까지 그대로 인정돼 김씨의 유죄가 확정됐다.

권석천이 ‘두 얼굴의 법원’에서 소개한 현실은 더 암울하다. ‘대법관 0순위’에 꼽혔던 유해용 변호사는 박근혜 전 대통령 ‘비선 의료진’의 특허소송 관련 자료를 청와대로 누설하는 등의 혐의를 받았다. 그는 기소되자마자 형사소송법 200조(피의자의 출석요구)와 312조(검사 또는 사법경찰관의 조서 등)가 위헌인지를 가려달라고 법원에 신청했다. 페이스북에는 이렇게 썼다. “참 부끄럽고 어리석게도 몸소 피의자, 피고인이 되어보고 나서야 현행법과 형법, 형사 소송법이 규정하고 있는 적법절차, 무죄추정, 증거재판주의, 피의사실공표 처벌 등이 얼마나 소중한지 뼈저리게 느끼게 됐습니다.”

‘사법행정권 남용’ 의혹으로 재판정에 선 양승태 전 대법원장도 “저는 이번에 이런 수사가 정말 불행했다고 생각하지만, 여러 법관들이 검찰에서 조사를 당하면서 검찰의 조서가 얼마나 경계해야 할 것인가 하는 점을 직접 체감할 수 있게 됐다”고 토로했다. 피고인으로 법정에 서고나서야 피고인의 처지를 이해하는 법관들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까. 이들에게 재판을 받았던 피고인들은 어떤 판결을 받았을까. 지금도 이런 판사들이 재판정에 앉아 있지 않을까 두렵다.



‘법 앞에 평등’ 선언 그쳐선 안돼

김두식의 ‘법률가들’에는 ‘평범한 판사 유병진’이라는 대목이 있다. 유 판사는 ‘비상사태 하의 범죄 사실에 관한 특별조치령’ 위반자들을 심리한다. 1950년 9·28 서울 수복 후 북한군에 부역했다는 혐의로 기소된 이들이다. 함남 함주 출신이었던 유 판사는 서울에서 인민군을 피해 곡절 끝에 부산까지 피란했다. 재판정에서 피고인을 마주한 그는 “내가 만약 서울에 남아 있었더라면 어떻게 되었을까?”라고 자문한다. 그는 재판관의 양심으로 그들에게 자신이 할 수 있는 것 이상을 요구할 수 없다고 생각했다. 피란 경험에서 나온 신념을 토대로 유 판사는 처벌을 최소화하려고 노력했고 피고인들에게 과감하게 무죄를 선고했다.

검찰이 1994년 부산에서 발생한 강주영양 유괴 살인 사건 피의자 네 명을 기소했다. 청와대는 악명 높은 ‘지존파’ 사건 여파가 가시기 전에 범인을 신속하게 검거했다며 경찰관들을 치하했다. 안기부에서 재판 보고서를 작성할 정도로 주시하기도 했다. 하지만, 포상에 눈이 먼 경찰의 무리한 수사는 진실을 은폐하지 못했다. 부산지법 형사부 재판장이던 박태범 부장판사는 피고인 4명 중 3명이 경찰의 고문에 못 이겨 거짓 자백을 했다는 호소에 귀를 기울인다. 검찰은 두 명에 대한 신체 검사를 했으나 아무런 상처가 없다는 부산구치소의 검사 결과를 내세워 반박한다. 그럼에도 의심을 거두지 않은 박태범 재판부는 이례적으로 기자들을 불러놓고 피고인에 대한 신체검증을 실시했다. 이들이 바짓단을 걷어 올리자 사건 발생 40일이 지났음에도 고문의 흔적이 여전히 선명했다. 나는 이런 판사가 그립다.

누구도 원치 않는 일이나 누구나 재판정에 서게 될 수 있다. 재판정에 선 사람이나 밖에 있는 사람들이나 처지는 달라도 소망은 같다. 헌법에 새겨진 ‘법 앞에 평등’이 선언에 그치지 않고 판사가 양심에 따라 실체적 진실을 규명해줄 것이라는 기대다. 부디 우직하게 헌법에 명시된 소임에 복무하는 법관이 많아졌으면 좋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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