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네필과 함께하는 영화산책] 핑크 클라우드
2024년 12월 28일(토) 10:00 가가
<19>현실이 된 영화 계엄·팬데믹 배경
재난상황 속 고립된 인간심리 주목
재난상황 속 고립된 인간심리 주목
‘핑크빛 세상’이란 말이 무람하게, 도처에 떠다니는 분홍 구름이 불길하다. 모월 모일 ‘원나잇’을 즐기다 모처에 갇혀버린 연인의 창가에 드리운 층운…. 접촉하면 곧장 사망하는 살상 구름으로 인해 두 사람은 닭장 속 인간을 자처한다.
응당 검은 그림자와 레퀴엠으로 점철될 법한 내러티브지만 어딜봐도 버블껌 색깔이라 기묘하다. 되레 선홍빛에 가까운 미장센은 불결한 죽음 이미지로 전도됐고 구름(희망), 핑크(사랑) 등 관습적 상징마저 뒤틀리고 꼬인다.
영화 속 격리된 세상은 팬데믹을, 정부가 선포한 계엄령은 작금의 현실을 겹쳐보게 한다. “실제 사건과 닮은 건 순전히 우연”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울리 제르바지 작 ‘핑크 클라우드’는 그런 작품이다.
티빙, 웨이브 등 OTT 플랫폼에서 상영 중인 작품은 국내에서 생소한 브라질 SF를 기치로 내걸었다. 그럼에도 개봉 당시 제54회 ‘뮌헨 국제영화제’ 미래상, 54회 ‘시체스영화제’ 최우수작품상을 석권하면서 예술성을 인정받았다.
고립 세계를 그린 유사한 작품으로 ‘컨테이젼’부터 ‘아웃브레이크’, ‘눈먼자들의 도시’ 등을 언급할 수 있다. 그러나 디스토피아적 분위기로 가득 찬 이들과 ‘핑크 클라우드’는 화사한 포스터나 아웃라인부터 대척된다. 색채 언어의 미학에 있어 빼놓을 수 없는 ‘그랜드 부다페스트 호텔’도 머리를 스치지만 뉘앙스가 다르다.
영화는 사랑하지 않았고, 그럭저럭 끌렸으나 운명 공동체가 돼버린 연인의 불협화음을 그린다.
금방 끝날 줄 알았던 격리가 지속되자 세상은 별천지가 된다. ‘분홍 구름’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격리 시대에 영혼의 짝을 찾는 방송 프로그램도 등장한다. ‘구름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글귀를 창문에 락카칠한 뒤 투신하는 이들의 존재는 비극 그 자체다.
정부는 드론과 튜브를 통해 집마다 생필품을 보급하면서 혼란을 막는다. 통상의 재난 영화가 아나키즘으로 그려지는 것과 달리 정부의 존재가 건재하다는 점은 흥미롭다.
그런 세상에서 연인들은 아이를 낳고 원격으로 화상 진료를 받는 등 그럭저럭 ‘잘’ 산다. 일하지 않아도 식량이 배급되기에 혹자에겐 이 비극적 세상이 유토피아일지 모른다.
이처럼 극단 상황에 SF 상상력을 가미한 영화지만, 렌즈는 사랑의 분열과 합일에 포커스를 맞춘다.
지오바나와 달리 야구는 연인의 등에 있는 점의 개수도, 아이를 왜 낳기 싫은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디테일을 파악하지 못한 채 질려버린 남자는 늦은 밤 화상채팅을 통해 다른 이를 탐한다. 지오바나도 옆 건물 남자와 원격으로 밀회를 즐긴다.
방에 갇힌 이들의 심리 변화도 볼거리다. 분홍색 구름은 물리적으로 인간들을 가둔 것을 넘어, 타자와 소통하는 욕망 자체를 한정하고 유폐시켰다.
지오바나와 야구는 역할극을 통해 다양한 페르소나를 대입, 답답한 마음을 환기한다. 킬러, 성인용품 사장, 변호사 등으로 변신하면서 고립감을 해소하려 들지만 쉽지 않다.
말미에서 분홍 구름은 녹색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종말이 도래했다거나, 곧 밖을 나갈 수 있으리란 징조로 해석하지만, 분홍빛이 재차 드리우면서 절망은 배가된다. 좌절한 지오바나는 옥상에 올라와 무방비로 구름에 노출된 채 열까지 센다. 그러나 앵커의 말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는 모습을 조명하며 영화는 그대로 끝.
전형적인 열린 결말이지만 해피앤드로 해석할 수 있는 단초들이 많다. 구름에 노출된 사람이 죽지 않았다는 점이나 군청색 하늘로 변했다는 점 외에도.
고통에 침잠해서, 함께하는 이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벗어남’의 전부라는 생각이 남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로에 갇힌 자가 그저 벽에 손을 댄 채 따라가기만 하면 탈출한다는 ‘오른손 법칙’이 뇌리를 스치는 이유다. 미로를 벗어나려 낑낑대기보다 내벽을 모두 톺아보고, 곁에 있는 자의 마음을 읽는 것이 절망을 극복하는 청사진이다.
야구와 지오바나 모두 일정 기간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방황했다. 그것이 미로의 본령이라면, 결말부의 분홍 구름은 희망을 띄워둔 부표 아닐까.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영화 속 격리된 세상은 팬데믹을, 정부가 선포한 계엄령은 작금의 현실을 겹쳐보게 한다. “실제 사건과 닮은 건 순전히 우연”이라는 문장으로 시작하는 이울리 제르바지 작 ‘핑크 클라우드’는 그런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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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폐된 방 안에서 창밖을 바라보는 지오바나. 그녀는 연인 야구와 의견충돌을 겪으며 외로움에 휩싸인다. |
금방 끝날 줄 알았던 격리가 지속되자 세상은 별천지가 된다. ‘분홍 구름’의 탄신일을 축하하는 사람들이 생겨나는가 하면, 격리 시대에 영혼의 짝을 찾는 방송 프로그램도 등장한다. ‘구름은 나를 죽이지 못한다’는 글귀를 창문에 락카칠한 뒤 투신하는 이들의 존재는 비극 그 자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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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 안에 갇힌 두 사람이 어색한 식사를 이어간다. 공교롭게도, 컵에 담긴 음료도 핑크색을 띤다. |
그런 세상에서 연인들은 아이를 낳고 원격으로 화상 진료를 받는 등 그럭저럭 ‘잘’ 산다. 일하지 않아도 식량이 배급되기에 혹자에겐 이 비극적 세상이 유토피아일지 모른다.
이처럼 극단 상황에 SF 상상력을 가미한 영화지만, 렌즈는 사랑의 분열과 합일에 포커스를 맞춘다.
지오바나와 달리 야구는 연인의 등에 있는 점의 개수도, 아이를 왜 낳기 싫은지도 이해하지 못한다. 디테일을 파악하지 못한 채 질려버린 남자는 늦은 밤 화상채팅을 통해 다른 이를 탐한다. 지오바나도 옆 건물 남자와 원격으로 밀회를 즐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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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화 초입에는 멀리서 밀려오는 분홍 구름을 볼 수 있다. 해안에서 이 살인 구름을 마주한 행인이 쓰러지는 장면. |
지오바나와 야구는 역할극을 통해 다양한 페르소나를 대입, 답답한 마음을 환기한다. 킬러, 성인용품 사장, 변호사 등으로 변신하면서 고립감을 해소하려 들지만 쉽지 않다.
말미에서 분홍 구름은 녹색으로 변모하기 시작한다. 어떤 이는 종말이 도래했다거나, 곧 밖을 나갈 수 있으리란 징조로 해석하지만, 분홍빛이 재차 드리우면서 절망은 배가된다. 좌절한 지오바나는 옥상에 올라와 무방비로 구름에 노출된 채 열까지 센다. 그러나 앵커의 말과 달리 시간이 지나도 죽지 않는 모습을 조명하며 영화는 그대로 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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살인 구름으로 인해 살아남은 자들은 외부로 이어지는 ‘튜브’를 통해 보급품을 분배 받는다. |
고통에 침잠해서, 함께하는 이의 마음에 귀 기울이는 것이 ‘벗어남’의 전부라는 생각이 남는다. 영화를 보는 내내 미로에 갇힌 자가 그저 벽에 손을 댄 채 따라가기만 하면 탈출한다는 ‘오른손 법칙’이 뇌리를 스치는 이유다. 미로를 벗어나려 낑낑대기보다 내벽을 모두 톺아보고, 곁에 있는 자의 마음을 읽는 것이 절망을 극복하는 청사진이다.
야구와 지오바나 모두 일정 기간 서로를 포기하지 않고 함께 방황했다. 그것이 미로의 본령이라면, 결말부의 분홍 구름은 희망을 띄워둔 부표 아닐까.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