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벨문학상과 계엄령, ‘다시 만난 세계’ - 송기동 예향부장·편집국 부국장
2024년 12월 11일(수) 00:00
“특별한 기적을 기다리지마 눈앞에선 우리의 거친 길은/ 알 수 없는 미래와 벽 바꾸지 않아 포기할 수 없어…”

지난 7일부터 매일 저녁 서울 여의도 국회 앞에서 열리는 촛불문화제’. 특히 10~20대 젊은 세대들이 촛불 대신 아이돌 그룹 응원봉을 들고 걸그룹 소녀시대의 ‘다시 만난 세계’를 ‘떼창’했다. 시국 관련 집회 때마다 불리던 귀에 익은 투쟁가와 민중가요 대신 아이돌 그룹의 K-팝을 부르고, 윤 대통령의 ‘탄핵’과 ‘퇴진’ 구호를 함께 외치는 모습이 이채로웠다. 옛 전남도청 앞 광장에서 열리는 탄핵촉구 집회에서도 같은 모습을 찾아볼 수 있었다. 수능시험을 마친 고3생과 20대 여성들이 로제 ‘아파트’와 ‘임을 위한 행진곡’, KIA 타이거즈 선수 응원가 등을 함께 불렀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시상식(10일)을 1주일 앞둔 지난 3일 밤 대통령 윤석열은 ‘비상계엄’을 선포했다. 하지만 국회에 투입된 중무장한 계엄군에 맨몸으로 용기 있게 맞선 야당 국회의원과 시민들의 힘으로 비상계엄을 6시간 만에 끝낼 수 있었다. 지지율 10%대의 대통령은 끝내 ‘내란죄 혐의 피의자’로 수사 대상에 오르며 자멸의 길에 들어섰다.



망월묘역에 묻힌 ‘동호’들

“정의에 어린마음 불태우고 세상 어둔 곳에 촛불 되는 사랑하는 나의 아우야! 순수한 너의 열정은 민주화의 초석이 되었구나!”

국립 5·18 민주묘지에 묻힌 양창근(당시 17살·숭의실업고 1학년) 열사의 비석 뒷면에 새겨진 문구다. 노벨문학상 수상작가 한강의 장편소설 ‘소년이 온다’에서 주인공 ‘동호’인 문재학(당시 16살·광주상고 1학년) 군이 간절하게 찾아다니던 초등학교 친구 ‘정대’의 실제 모델이다. 1980년 5월 21일 광주 대인동 시외버스 공영터미널 인근에서 머리에 계엄군의 총격을 받고 사망해 망월 묘역에 묻혔다.

그런데 41년이 흐른 지난 2021년 12월, 5·18진상규명조사위원회의 무명(無名)열사 유전자검사 결과 새로운 사실이 밝혀졌다. 기존 양 군으로 알려진 ‘1구역-38’에 안장된 유해는 김광복(당시 14살)군으로 확인되고, ‘4구역-96’ 무명열사 유해가 양창근 군 유가족의 유전자와 일치한 것이다.

광주상고(현 동성고) 1학년 동기인 문재학과 안종필은 5월 27일 새벽 4시께 전남도청 뒤편 건물인 전남도경 2층 복도에서 진압군의 총격에 목숨을 잃었다. 진압작전이 끝난 뒤 가장 먼저 도청에 들어간 외신기자 노먼 소프(아시아 월스트리트 저널)의 카메라에 두 친구의 마지막 모습이 생생하게 기록됐다. 교련복 차림의 두 사람 주위에 총기는 없고 먹다만 빵 두 조각이 놓여 있을 뿐이었다. 한강 작가의 노벨문학상 수상자 발표 이후 소설 속 ‘동호’를 찾아오는 참배객들이 많다고 한다.(문재학·안종필 열사의 묘지번호는 1묘역의 2구역-34, 41번이다.)

스웨덴 한림원은 지난 10월 한강 작가의 ‘소년이 온다’ 등 작품세계에 대해 “역사적 트라우마에 맞서고 인간의 삶의 연약함을 드러낸 강렬한 시적산문”이라며 노벨상 선정 이유를 밝혔다. 노벨문학상 수상과 비상계엄령 선포, 전혀 어울리지 않는 두 개의 조합이 2024년 12월에 한국에서 현실화됐다. 무엇보다 ‘12·3 비상계엄 사태’는 한국에서 ‘제왕적 대통령’에 의해 언제든 ‘80년 5월’과 같은 폭압적 국가폭력이 재연될 수 있음을 여실히 보여주었다.



‘새로운 정치’ 바라는 MZ 세대

어제도, 오늘도 수많은 시민들이 차가운 겨울 날씨에도 불구하고 거리에 나와 집회에 참여하고 있다. 그중 MZ 세대의 시위 참여는 소설속 ‘동호’와 오버랩 된다. 태어나서 처음으로 ‘계엄령’을 맛본 젊은 세대는 ‘새로운 정치’에 눈을 뜨며 민주시민으로서 당연한 ‘질문’들을 던지고 있다.

1980년과 2024년 10대가 꿈꾸는 ‘미래’는 다르지 않을 것이다. 정부와 정치권은 젊은 세대에 한국 정치의 ‘비전’을 제시해야 한다. 극단의 정치가 아니라 상생의 정치가 돼야 한다. 비상계엄령을 선포해 국민들의 기본권을 제약하고 무소불위(無所不爲) 권력을 휘두르는 독재의 구태는 이제 없어져야 할 것이다. 소설 ‘소년이 온다’ 6장은 아들 ‘동호’를 잃은 어머니가 화자(話者)로 등장한다. 나무그늘이 햇빛 가리는 것을 싫어하는 ‘동호’는 어머니의 입을 빌려 이렇게 말한다.

“…엄마, 저쪽으로 가아, 기왕이면 햇빛 있는 데로. 못 이기는 척 나는 한없이 네 손에 끌려 걸어갔제. 엄마아, 저기 밝은 데는 꽃도 많이 폈네. 왜 캄캄한 데로 가아, 저쪽으로 가, 꽃 핀 쪽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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