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인 여공들의 눈물겨운 삶 증언, 다큐로 만난다
2024년 08월 13일(화) 19:35 가가
이원식 감독 ‘조선인 여공의 노래’
광복절 앞두고 전국 극장가 개봉
광주극장·광주독립영화관도 상영
광복절 앞두고 전국 극장가 개봉
광주극장·광주독립영화관도 상영
영화는 일본 이쿠노구에서 ‘호르몬(ホルモン)’을 판매하는 점포를 비추며 시작된다. 오사카 사투리로 ‘쓰레기’를 뜻하는 호르몬은 육류 중에서도 곱창이나 대창 등 내장 부위를 가리킨다. 오늘날 일본에서 인기가 높지만 쓰레기라 부르게 된 데에는 아픈 사연이 있다.
‘호르몬’은 일제강점기 일본 방적 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들의 눈물겨운 삶을 상징한다. 당시 일본인들은 돼지 내장을 먹지 않고 버렸는데 노역에 시달리던 조선인 방적공들은 이를 주워 먹으며 연명했다. 10대에 불과했던 소녀들은 ‘조센징 돼지’라는 놀림과 핍박을 견뎌야 했다.
지난 7일 개봉한 이원식 감독의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일본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여공 22명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전국 멀티플렉스 및 광주극장, 광주독립영화관 등에서 개봉해 주목받고 있다.
그동안 ‘귀향’, ‘눈길’ 등 위안부 문제를 고발하거나 강제징용을 다룬 ‘군함도’ 같은 작품은 있었으나, 방적 여공 문제를 모티브 삼은 영화는 만나기 어려웠던 것이 현실이다.
‘조선인 방적 여공 문제’는 청소년 노동, 폭행, 성폭력, 반강제적 매매혼 등과 맞물려 있다. 1910~30년대 조선인 소녀들은 돈을 벌기 위해 현해탄을 건너지만 정작 이들을 기다리고 있던 것은 살인적 노동과 폭력이었다.
영화는 방적공장의 실상을 전하는 ‘프리젠터’ 역을 맡은 강하나 배우가 여공으로 일했던 이들의 구술·채록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강 씨는 먼저 1920~30년대 키시와다 방적 공장에서 일했던 증언자의 기억을 마주한다.
성순영 씨에 따르면 “15~16세 정도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이 여공으로 모집됐다. 일본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 자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조선에서 살길이 막막했던 이들이 타향으로 떠났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히구치 요이치 씨와 함께 테라다 방적공장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면도 있다. 을씨년스러운 공장 풍경을 보니 여공들의 고통이 짐작됐다. 기록에 따르면 이 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은 170명에 달한다.
당시 막내였던 신남숙(여·99)의 구술도 인상적이다. 그는 부산에서부터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항으로 떠나던 날의 슬픔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신 씨는 1936~41년까지 5년간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면서 졸음을 참던 기억도 들려줬다. 어쩌다가 실수로 ‘실’이라도 끊는 날이면 폭행도 이어졌다고 한다.
“조선인 여공이 사람이라면 나비나 잠자리도 새라 불러야겠지”(방적 공장에 적혀있는 낙서 중)
일제의 만행은 여공들이 다쳤을 때에도 계속됐다. 1920~30년대 키시와다 공장에서 일한 정이순 씨는 졸다가 팔이 기계 안으로 말려들어간 경험을 풀어 놓으며 “살점이 모두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일본인 감시자들은 ‘네가 조니까 다치는 거야’라며 폭언했다”고 말했다.
여공들은 함석지붕에 다다미 대신 거적때기를 깐 바닥에서 공동 생활했으며 좁은 테니스장 크기의 부지에 200여 명이 모여 살았다. 이 같은 장면을 보여줄 때에는 오사카 신문이나 공장 사진 등 사료들을 함께 제시해 사실감을 더했다.
방적 공장 입구에는 감시병이 있어서 외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공 대부분이 한글을 몰랐기에 가족과 소통할 수도 없었다.
아울러 영화는 사분오열된 우리 민족의 고통도 직시한다. 여공들은 일본인 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파생한 단체 ‘상애회’를 통해서도 고통을 겪는다.
당초 상애회는 직업알선, 해외 숙박을 제공하기 위해 결성됐지만 일본 경찰, 행정기관과 결탁해 여공들의 노동 쟁의를 막았다.
이런 상황 속에도 여공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글 야학을 개설해 조선어를 배웠으며 나이가 어린 동생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끝까지 살아남아 과거를 증언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강인한 생명력 그 자체다.
“자 우리 여공들이여 오늘 일과를 말해보자/ 밤 중에 한밤중 깊은 잠 들때 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눈 뜨고(…)”
‘조선인 여공의 노래’와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
지난 7일 개봉한 이원식 감독의 영화 ‘조선인 여공의 노래’는 일제강점기 일본 방적공장에서 일했던 여공 22명의 증언을 담은 다큐멘터리 필름이다. 광복절을 앞두고 전국 멀티플렉스 및 광주극장, 광주독립영화관 등에서 개봉해 주목받고 있다.
영화는 방적공장의 실상을 전하는 ‘프리젠터’ 역을 맡은 강하나 배우가 여공으로 일했던 이들의 구술·채록을 풀어내는 방식으로 전개된다. 강 씨는 먼저 1920~30년대 키시와다 방적 공장에서 일했던 증언자의 기억을 마주한다.
성순영 씨에 따르면 “15~16세 정도밖에 되지 않은 소녀들이 여공으로 모집됐다. 일본에 귀신이 있다고 생각해 자원하는 사람이 많지 않았으나, 조선에서 살길이 막막했던 이들이 타향으로 떠났다”고 한다.
일본의 역사학자인 히구치 요이치 씨와 함께 테라다 방적공장의 모습을 살펴보는 장면도 있다. 을씨년스러운 공장 풍경을 보니 여공들의 고통이 짐작됐다. 기록에 따르면 이 공장에서 일했던 조선인 여공은 170명에 달한다.
당시 막내였던 신남숙(여·99)의 구술도 인상적이다. 그는 부산에서부터 배를 타고 시모노세키항으로 떠나던 날의 슬픔을 생생하게 풀어낸다. 신 씨는 1936~41년까지 5년간 새벽 6시부터 오후 6시까지 근무하면서 졸음을 참던 기억도 들려줬다. 어쩌다가 실수로 ‘실’이라도 끊는 날이면 폭행도 이어졌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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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녀들은 일본인 감시자에게 구타와 폭언 등을 당하며 일을 해야 했다. 과로에 졸고 있는 여공 모습. |
일제의 만행은 여공들이 다쳤을 때에도 계속됐다. 1920~30년대 키시와다 공장에서 일한 정이순 씨는 졸다가 팔이 기계 안으로 말려들어간 경험을 풀어 놓으며 “살점이 모두 떨어져 나갈 정도로 큰 부상이었지만 일본인 감시자들은 ‘네가 조니까 다치는 거야’라며 폭언했다”고 말했다.
여공들은 함석지붕에 다다미 대신 거적때기를 깐 바닥에서 공동 생활했으며 좁은 테니스장 크기의 부지에 200여 명이 모여 살았다. 이 같은 장면을 보여줄 때에는 오사카 신문이나 공장 사진 등 사료들을 함께 제시해 사실감을 더했다.
방적 공장 입구에는 감시병이 있어서 외출하는 것도 쉽지 않았다. 여공 대부분이 한글을 몰랐기에 가족과 소통할 수도 없었다.
아울러 영화는 사분오열된 우리 민족의 고통도 직시한다. 여공들은 일본인 뿐만 아니라 재일조선인 사회에서 파생한 단체 ‘상애회’를 통해서도 고통을 겪는다.
당초 상애회는 직업알선, 해외 숙박을 제공하기 위해 결성됐지만 일본 경찰, 행정기관과 결탁해 여공들의 노동 쟁의를 막았다.
이런 상황 속에도 여공들은 ‘희망의 끈’을 놓지 않았다. 한글 야학을 개설해 조선어를 배웠으며 나이가 어린 동생들을 챙겨주기도 했다. 끝까지 살아남아 과거를 증언하는 여인들의 모습은 강인한 생명력 그 자체다.
“자 우리 여공들이여 오늘 일과를 말해보자/ 밤 중에 한밤중 깊은 잠 들때 잠을 깨우는/ 시끄러운 소리에 놀라 눈 뜨고(…)”
‘조선인 여공의 노래’와 함께 영화는 막을 내린다.
/최류빈 기자 rub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