화해와 일치-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4년 06월 13일(목) 21:30 가가
호국보훈의 달인 6월이다. 가톨릭교회는 6월을 ‘예수 성심 성월’이라는 이름으로 구원자로 오신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세상에서 용서하고 사랑하고 희생하여, 보다 나은 세상을 위해 노력한다. 특히 6·25 전쟁의 아픈 상처가 있는 6월에,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기도를 바치고 미사를 드리면서 분단된 우리나라의 평화와 공존, 민족의 화해와 일치에 노력하는 달이기도 하다. 6·25 전쟁 전에는 북한 지역에 가톨릭교회의 전교가 꽤 활발했다고 한다.
그러나 전쟁의 여파는 종교뿐만 아니라 우리 민족의 모든 근간을 무너뜨렸고 회복될 수 없는 상처를 주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70여 년이 지나고 있다. 언젠가 남북이 평화를 이루고 자유로운 왕래까지 이루어지기를 간절히 희망하며 비록 작지만 노력하고 기도하고 미사를 드리는 것이다. 그러나 정작 우리는 마음으로부터 남북의 통일과 민족의 화해와 일치를 바라고 있는지 궁금하다.
최근 통일에 관한 설문 조사를 했는데 ‘청소년 대상 통일 여론조사’의 결과가 매우 인상적이다. 통일의 필요성에 대해 53.8%가 응답했지만, 불필요하다는 응답률이 40.0%로 조사되었다. 통일이 필요 없다는 응답률은 일반 성인의 응답률보다 20% 가까이 낮게 조사되었다. 통일이 필요하지 않은 이유에 대해 극심한 정치적 사회적 혼란이 발생할 것이라고 높게 조사되었다. 남과 북이 협력의 대상이냐는 질문에 이 또한 부정적인 응답이 많았다. 통일은 정말 어려운 것인가? 한민족이었던 남·북의 관계가 계속 갈라져야만 하는 것일까? 남과 북이 서로를 바라보는 시선이 너무 다를 뿐만 아니라 우리 내에서도 화해와 일치보다 단절된 의견의 충돌이 계속 지속되는데 우리는 이를 가만히 보고만 있어야 하는가?
지난 6월 4일, 정부는 2018년 문재인 정부 때 남과 북이 맺은 ‘9·19 남북 군사합의’에 대한 전체 효력 정지를 국무회의에서 의결해 버렸다. ‘9·19 남북 군사합의’는 남북 모두 우발적 충돌을 막는 최후의 안전핀 역할을 했었다. 정부의 합의서에 대한 효력 정지 의결조치로 인해 남북 접견 지역에서의 군사적 위기는 더욱 커질 것이 자명하다. “힘으로 평화를 지킬 수 있다”는 주장을 하면서 합의서 효력 정지를 의결해 버린 것이다.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평화라는 사전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평화(平和)란 ‘평온하고 화목하거나 전쟁이나 분쟁 따위가 없는 평온함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다투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힘에 의한 평화는 가능한가? 서로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한쪽만을 위한 평화, 다른 한쪽은 짓밟히고 억눌리고 파괴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평화라는 이름을 가장한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70여 년, 결코 짧지 않은 분단의 역사이다. 그러나 분열과 다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해와 일치의 물결이 있었고 그 아름다운 금강산도 방문했었던 기억도 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평화를 이룬다면,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려 노력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평화 그리고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씨앗을 뿌릴 수 있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
호국 보훈의 달에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던 분들의 숭고함을 기리고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세상과 함께 예수님의 평화와 자비 그리고 화해의 마음을 닮아가는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을 보내면서 평화를 위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일치를 조성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기를 권고한다. 6·25의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오랫동안 단절된 상태에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교회가 언제나 힘을 얻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예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
평화를 이루기 위해서 제일 중요한 것이 무엇일까? 평화라는 사전적 의미를 다시 한번 새겨본다. 평화(平和)란 ‘평온하고 화목하거나 전쟁이나 분쟁 따위가 없는 평온함 또는 그 상태’를 의미한다. 쉽게 말해 다투지 않고 서로 이해하고 우호적으로 조화를 이루는 상태로 이해될 수 있다. 그렇다면 힘에 의한 평화는 가능한가? 서로를 위한 평화가 아니라 한쪽만을 위한 평화, 다른 한쪽은 짓밟히고 억눌리고 파괴됨을 의미하는 것이다. 힘에 의한 평화는 이루어질 수 없고 그 평화가 이루어졌다고 해도 그것은 평화라는 이름을 가장한 또 다른 폭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70여 년, 결코 짧지 않은 분단의 역사이다. 그러나 분열과 다툼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화해와 일치의 물결이 있었고 그 아름다운 금강산도 방문했었던 기억도 있다. 남과 북이 서로를 조금씩 이해하면서 평화를 이룬다면, 우리 민족이 화해와 일치를 이루려 노력한다면, 우리뿐만 아니라 세계의 평화에도 큰 역할을 할 것이다. 우리 민족의 평화 그리고 화해와 일치를 위한 길은 쉽지 않다. 그러나 우리가 삶의 자리에서 평화의 씨앗을 뿌릴 수 있고 화해와 일치를 이루는 환경을 만들어갈 수 있다.
호국 보훈의 달에 우리는 나라를 지키기 위해 목숨을 바치셨던 분들의 숭고함을 기리고 전쟁의 참혹함을 잊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교회는 세상과 함께 예수님의 평화와 자비 그리고 화해의 마음을 닮아가는 ‘예수 성심 성월’인 6월을 보내면서 평화를 위한 용서와 화해 그리고 일치를 조성하기 위해 사랑과 희생의 삶을 살아가기를 권고한다. 6·25의 참혹한 전쟁으로 인해 얼마나 오랫동안 단절된 상태에서 고통을 겪어야만 했는지 우리는 잊지 말아야 한다. 가톨릭교회가 언제나 힘을 얻어 세상의 빛과 소금의 역할을 하도록 이끌어주는 예수의 말씀을 다시 한번 되새겨본다. “평화가 너희와 함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