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심과 배려의 힘 - 김창균 빛고을고등학교 교장
2024년 04월 16일(화) 22:00 가가
지난달에 돼지 화가 ‘피그카소’가 사망했다는 소식이 전해졌다. 피그카소는 돼지를 뜻하는 ‘피그’(pig)와 스페인 화가 ‘피카소’(Picasso)를 합친 말로 2019년 한 전시회에서 피카소 화풍을 닮았다는 칭찬을 들은 이후 얻은 별명이라고 한다.
도축장에서 구조된 돼지 한 마리를 화가로 거듭나게 한 것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한 동물보호단체 운영자 조앤 레프슨의 관심이었다. 구조 직후 피그카소는 우리에 있던 물품을 송두리째 부쉈지만 붓만은 멀쩡했다. 이를 본 레프슨은 그의 입에 붓을 물려 하얀 캔버스 앞에 서게 했고, 그의 작품 가운데 하나인 ‘야생과 자유’는 비인간 동물이 만든 작품 가운데 가장 비싼 가격인 2만 파운드(약 3100만원)에 팔렸다.
한편 세계적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은 개 식용처럼 첨예한 갈등 상황을 해결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설득하는 것이 좋은데 피그카소가 좋은 예라고 하였다. 돼지가 똑똑한 동물임을 알리기 위해 피그카소의 모습을 보여주면 이를 본 사람들은 “이제 베이컨을 못 먹게 됐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그런데 레프슨과 피그카소를 이어준 것은 갑작스러운 감정이었을까. 얼핏 보면 어쩌다 얻게 된 운명 같지만 우연과 운명 사이에는 예삿일을 간과하지 않은 ‘정곡을 찌르는 탐문’이 존재하지 않았을까 싶다. 피그카소가 화가로서의 유명세와 더불어 동물 복지의 상징으로 자리한 데는 붓에 대한 애착을 포착한 레프슨의 역할이 컸다.
그 결과 피그카소는 베이컨이 될 운명에서 벗어났고 그의 재능을 통해 수백만 명의 사람으로 하여금 먹는 것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볼 수 있도록 했다. 이제 피그카소는 무지개다리를 건넜지만 그의 사연은 가십거리를 넘어서 사소한 순간을 놓치지 않는 예리한 관심과 배려의 힘을 생각하게 한다.
최근에 다시 접한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책 ‘점’에는 무엇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아이 ‘베티’와 함께하는 선생님이 등장한다. 어느 날 미술 시간,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베티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그때 다가온 선생님은 베티의 텅 빈 도화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와! 눈보라 속에 있는 북극곰을 그렸네.”
베티는 “놀리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못 그리겠어요.”라고 소리쳤지만 선생님은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그려보라고 한다. 결국 베티는 도화지 위에 연필을 내리꽂아 점 하나를 찍고 이를 본 선생님은 그 옆에 베티의 이름을 쓰게 한다. 일주일 후 베티의 서명이 선명한 ‘점(point)’ 그림이 금테 액자에 걸렸고 이후 베티는 훨씬 다양하고 멋진 형태의 점을 연습하여 성대하게 전시회까지 열게 된다.
우리 교육은 오랫동안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주입식 교육의 학습 모델을 추구해 왔다. 지금도 입시 지향의 단기적, 결과 중심의 평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는 AI 교사의 등장을 놓고 교육은 인간과 인간의 교류에 의한 상호작용이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두둔하지만 여전히 획일성과 효율성의 늪은 깊기만 하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무엇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아이에게 길을 터주는 역할이 선생님에게 있다는 점이다. 뭐라도 시도해 보라는 배려의 마음은 하얀 백지에서 눈보라 속의 곰을 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 다음으로 반항의 결과물처럼 보일지라도 이를 아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작품이라고 인정해주는 데서 아이의 잠재성은 발현의 여지를 남긴다.
선생님이 본 눈보라 속 곰은 아마도 베티 내면에 잠재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이를 인내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게 안내하고 여기에 개성과 창의력을 담아 훌륭한 작품으로 이끈 것은 선생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추상의 세계에서 홀로 자유를 누리다 생을 끝낸 피그카소와 달리 베티는 더 넓은 세상을 열어간다. 누나처럼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겠다고 베티를 부러워하는 한 아이에게 너도 할 수 있으니 그려보라며 도화지를 건넨다. 그러고 나서 연필을 쥐여주며 이름을 쓰라고 말한다. 베티의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
한편 세계적 동물학자이자 환경운동가인 제인 구달은 개 식용처럼 첨예한 갈등 상황을 해결할 때는 상대방에 대한 공격이나 비난보다는 이야기를 들려주며 설득하는 것이 좋은데 피그카소가 좋은 예라고 하였다. 돼지가 똑똑한 동물임을 알리기 위해 피그카소의 모습을 보여주면 이를 본 사람들은 “이제 베이컨을 못 먹게 됐다”는 반응을 보인다는 것이다.
최근에 다시 접한 피터 레이놀즈의 그림책 ‘점’에는 무엇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아이 ‘베티’와 함께하는 선생님이 등장한다. 어느 날 미술 시간, 그림 그리기에 열중하는 다른 아이들과 달리 베티는 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다. 그때 다가온 선생님은 베티의 텅 빈 도화지를 보고 이렇게 말한다. “와! 눈보라 속에 있는 북극곰을 그렸네.”
베티는 “놀리지 마세요. 전 아무것도 못 그리겠어요.”라고 소리쳤지만 선생님은 어떤 것이라도 좋으니 그려보라고 한다. 결국 베티는 도화지 위에 연필을 내리꽂아 점 하나를 찍고 이를 본 선생님은 그 옆에 베티의 이름을 쓰게 한다. 일주일 후 베티의 서명이 선명한 ‘점(point)’ 그림이 금테 액자에 걸렸고 이후 베티는 훨씬 다양하고 멋진 형태의 점을 연습하여 성대하게 전시회까지 열게 된다.
우리 교육은 오랫동안 과정보다 결과를 중시하는 주입식 교육의 학습 모델을 추구해 왔다. 지금도 입시 지향의 단기적, 결과 중심의 평가에 초점을 두고 있다는 비판에서 자유롭지 못하다. 최근에는 AI 교사의 등장을 놓고 교육은 인간과 인간의 교류에 의한 상호작용이어야 한다는 원론적 입장을 두둔하지만 여전히 획일성과 효율성의 늪은 깊기만 하다.
그래도 분명한 것은 무엇을 해볼 엄두를 내지 못하는 아이에게 길을 터주는 역할이 선생님에게 있다는 점이다. 뭐라도 시도해 보라는 배려의 마음은 하얀 백지에서 눈보라 속의 곰을 알아보는 데서 출발한다. 다음으로 반항의 결과물처럼 보일지라도 이를 아이가 해낼 수 있는 최선의 작품이라고 인정해주는 데서 아이의 잠재성은 발현의 여지를 남긴다.
선생님이 본 눈보라 속 곰은 아마도 베티 내면에 잠재한 열망이었을 것이다. 이를 인내 속에서 자기가 하고 싶은 대로 표현하게 안내하고 여기에 개성과 창의력을 담아 훌륭한 작품으로 이끈 것은 선생님이기에 가능한 일이었다.
더욱이 추상의 세계에서 홀로 자유를 누리다 생을 끝낸 피그카소와 달리 베티는 더 넓은 세상을 열어간다. 누나처럼 그림을 잘 그렸으면 좋겠다고 베티를 부러워하는 한 아이에게 너도 할 수 있으니 그려보라며 도화지를 건넨다. 그러고 나서 연필을 쥐여주며 이름을 쓰라고 말한다. 베티의 선생님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