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군 남양동의 작은 마을에 자리한 리:피움 미술관. 옛 남양동초등학교였던 이곳은 1998년 폐교 후 20여 년간 방치돼 있던 건물을 2019년 사들여 새 숨을 불어넣은 공간이다. 잡풀과 가시덤불, 무너진 교실 바닥만 남았던 폐허 같은 자리에 꽃잔디 1만 포트가 심어지고 무너진 벽이 보수되면서 미술관은 ‘다시, 피어나다’라는 이름처럼 되살아났다.

2500평의 넓은 부지에 조성된 야외 정원은 계절마다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가을에 피어날 코스모스를 기대하며 지난 봄 애써 꽃을 키웠지만 올해는 가뭄으로 모두 말라버려 아쉬운 마음이다. 다시 마음을 다잡고 내년 봄에 피어날 자운영 씨앗을 뿌려두었다는 여권주 관장의 말 속에서 이 공간이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사계절의 호흡을 담는 생명력 있는 미술관임을 느낄 수 있다.

여 관장은 경상도 거제가 고향으로, 직장 생활을 청주에서 마친 뒤 아내 강미라 작가와 함께 고흥에 정착했다. 은퇴 후에도 지속할 수 있는 일을 찾던 그는 충청도에서 접했던 ‘폐교 미술관’ 사례에 영감을 얻어 직접 이 길에 뛰어들었다.

가격이 비교적 합리적이었던 전남 지역 폐교 부지를 물색하다가 지금의 공간에 마음이 꽂혔다. 무너진 교실과 새어드는 빗물, 지붕조차 없는 건물을 포크레인으로 열흘간 밀어내고 나무를 심으면서 시작된 재건은 2년의 시간을 거쳐 지금의 리:피움으로 태어났다. 관장이 운영을 맡고, 아내 강미라 작가는 한지를 이용한 회화와 조형 작업활동에 매진한다.

강미라 작가의 다양한 한지 조형작품들을 만날 수 있는 리:피움 미술관 전시실. /최현배 기자

미술관은 1층과 2층에 걸쳐 총 6개의 전시실로 구성돼 있다. 1층에는 카페와 미니 아트숍, 한지 조형물이 전시된 공간이 있고 2층에는 한지 그림 전시실과 다목적실이 자리한다. 1층 복도 벽면에는 미술관의 과거와 현재를 담은 사진들이 걸려 있어 폐허에서 다시 피어난 과정을 눈으로 확인할 수 있다.

무엇보다 눈길을 사로잡는 건 강미라 작가의 한지 작업이다. 일반적으로 떠올리는 한지 공예와는 전혀 다르다. 붓을 쓰지 않고 염색된 한지를 찢어 핀셋으로 한 올 한 올 붙여 그림을 완성하거나, 한지를 주무르고 펼쳐 섬유 형태로 변형시켜 조형 작품으로 재탄생시킨다. 전분을 바른 종이 위에 섬세하게 올려지는 작은 조각들은 수개월, 때로는 수년에 걸친 노동 끝에 비로소 한 점의 작품으로 완성된다.

미술관 전시실 앞에는 “이곳에서 잠시 쉬어가길 바라”라는 문구가 걸려 있다. 작품 감상만이 아니라 휴식과 치유를 선물하고 싶다는 작가의 바람이 담겼다.

작품 앞에 서면 ‘종이’라는 재료에 대한 기존의 고정관념이 단숨에 깨진다. 멀리서 보면 유화처럼 보이던 그림이 가까이 다가서면 한 올 한 올의 섬유가 살아 움직이며 빛을 머금은 듯 반짝인다.

‘리:피움’ 미술관 복도에 전시된 강미라 작가의 한지 조형작품. /최현배 기자

물방울이 맺힌 장면을 표현한 작품은 붓으로 그린 듯 정교하지만 사실은 흰색 한지 섬유만으로 구현한 결과물이다. 또 다른 전시실은 ‘상처와 치유’를 주제로 탈색된 종이를 이용해 생명의 소멸과 소멸 이후의 흔적을 보여주고, 이어지는 공간에서는 ‘생명의 순환’을 콘셉트로 비워지고 해체된 종이에 다시 생명이 피어나는 과정을 담았다. ‘종이가 해체되고 비워져서 섬유 형태로 남은 결과물은 오래된 기억과도 비슷하다’는 말이 어렴풋이 와닿는다. 관람객 중에 작품 앞에서 눈물을 글썽이는 이도 있다고 한다.

강미라 작가가 한지 그림을 본격적으로 시작한 것은 미술 전공을 살려 한지 공예를 넘어선 시도를 하면서부터다. 현재는 한지 그림보다 조형 활동에 매진하고 있다.

한지는 찢고, 바르고, 비비고, 바느질하면서 전혀 새로운 차원의 미감으로 재탄생한다. 개인전 한 번을 열기 위해서는 최소 3~4년을 준비해야 할 만큼 고된 작업이다. 그럼에도 꾸준히 새 작품을 내는 이유는 이곳을 처음 찾은 관람객이 신선함을 느끼듯 다시 찾은 이들이 또 다른 감동을 경험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함이다.

리:피움 미술관 1층 카페 내부. /최현배 기자

리:피움 미술관은 상설 전시 외에도 다양한 체험 프로그램을 운영한다. 한지를 직접 떠서 꽃잎을 넣어 엽서를 만들거나 한지로 나비 가랜드와 작은 액자를 꾸미고 고흥 특산품인 유자를 형상화한 무드등을 제작할 수도 있다. 아이들과 함께하는 가족 단위 방문객뿐 아니라 교사와 예술계 종사자들까지 찾아와 손으로 만지고 직접 느끼는 체험을 통해 한지의 매력을 새롭게 발견한다. 2층 다목적실에는 드로잉 작품도 걸려 있는데, 미술관의 사계절 풍경과 함께 일곱 마리 고양이의 일상이 담겨 있어 공간에 대한 애정이 묻어난다.

현재 미술관에는 강미라 작가의 작품이 상설 전시되고 있어 외부 작가의 전시는 많지 않지만, 앞으로 기획전을 통해 무대를 확장할 계획이다. 미술관을 찾은 관람객들은 “전국 어디에서도 볼 수 없는 작품”이라며 놀라움을 감추지 못한 채 다시 오겠다는 약속을 남기고 돌아간다.

폐교를 활용해 만든 리:피움 미술관 전경. /최현배 기자

작품은 아직 판매하지 않는다. 수량도 적고 가격 책정도 쉽지 않기 때문이다. 하지만 시간이 흐르면 판매를 고려할 수도 있다는 말에서 앞으로의 변화를 기대하게 한다.

운영 방식도 독특하다. 대부분의 미술관이 월요일을 휴관일로 정하는 것과 달리 리:피움은 월요일에 문을 열고 화·수·목을 휴관일로 한다. 월요일에 쉬는 직장인이나 다른 미술관이 닫는 날 찾아오는 방문객들을 배려한 운영이다. 휴관일에는 정원 관리와 내부 보수, 체험 준비가 이어진다.

“리:피움은 단순한 전시장이 아니라 한지를 매개로 ‘다시 피어나는 삶’을 보여주는 공간입니다. 폐교가 미술관으로 거듭나고 한 장의 종이가 예술작품으로 태어나는 이곳에서 관람객들은 멈췄던 시간을 다시 움직이게 하는 예술의 힘을 경험할 수 있습니다. 고흥의 시골 마을에 자리한 작은 미술관이지만 방문객들에게 오래도록 마음에 남는 감동을 주고 싶습니다.”



/이보람·주각중 기자 boram@kwangju.co.kr

/사진=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