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별과 평등 사이 - 황성호 신부, 광주가톨릭 사회복지회 부국장
2024년 04월 11일(목) 22:00
이 시대를 살아가는 한 사람으로서, 가톨릭교회 성직자로서, 그리고 현장에서 이주민과 북한 이탈주민들을 만나면서 자주 던지는 질문이 있다.

우리 안에 차별이 존재하는가? 우리는 정말 평등할 수 없다는 말인가? 소외되고 가난하며 약자라고 일컬어지는 이들은 언제나 뒷전으로 밀려나도 괜찮은 것인가? 차별(差別)이라는 말은 차등을 두어 구별한다는 사전적 의미를 지니고 있는데, 우리가 같은 존재를 등수로 나누어 구별할 수 있냐는 말이다.

차별의 반대말을 생각해봤다. 등수가 없고 구별되지도 않는 것, 차별의 반대말은 ‘평등’(平等)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이주민들을 만나면서 자주 생각하는 말이 있다.

“등록 이주민이나 미등록 이주민이나 하느님 앞에 서면 똑같은 사람인데, 우리는 왜 그렇게 차별적으로 대하고 곱지 않은 시선으로 바라보는 것일까?” 등록과 미등록의 법적인 개념을 이야기하고 싶지는 않다. ‘나’라는 존재가 존중받고 사랑받아야 하는 존재라면, ‘너’라는 다른 사람도 당연히 존중받아야 하고 사랑받아야 한다는 것이 중요하다.

그러나 우리는 다르다는 이유로 차별하고 편견과 잘못된 판단으로 그 소중함을 처참하게 짓밟아버린다. 평등하게 대하면 내가 손해를 보는 것일까? 아니면 차별적으로 대하면 내가 좀 더 높이 올라설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일까? 엄연히 우리는 서로 다르다. 그러나 이주민들은 함께 살고 있고 이웃이 되고 있고 어렵고 더럽고 힘든 일을 도맡아 하고 있는데 평등하게 대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궁금하다.

7년 가까운 시간을 남미 칠레에서 선교사로 살았다. 언어와 문화 그리고 음식까지도 달랐던 그곳에서 내가 받아들였던 기억이 떠오른다. 언어가 다르고 생김새가 달라 중국인이라 놀림을 받으며 차별받고 곱지 않은 시선을 받았었다. 그래도 칠레 빈민가의 형제들을 존중과 배려로 대했고 인내와 사랑으로 함께 지내려고 했었다.

시간이 지나고 한국으로 돌아와야 할 무렵, 빈민가 성당의 친구들이 준비한 환송식 때였다. 나이 지긋한 어르신이 “신부님! 우리 성당 신부님은 한국 신부님, 당신입니다.”라며 울먹거리며 안아주었다. 최고의 찬사였고 아직도 온몸과 마음에 울리고 있는 사랑의 메시지였다.

필자가 칠레에서 특별히 무엇을 잘해 이런 찬사를 들었던 것은 아니다. 함께 울었고, 함께 웃었고, 함께 부둥켜안고 고통과 슬픔과 어려움을 나누었을 뿐이었다. 그런데 이웃으로 옆에 함께 해주었던 나를 칠레 빈민가의 친구들은 다시 나를 이웃이요 형제로 동등하게 대해 주었다. 빈민가 친구들이 바로 나였고, 내가 바로 빈민가의 친구였었다. 다르지만 평등의 시각을 가지고 대하는 것은 닫혔던 문을 열어 서로를 받아들이고 인정하게 된다. 다름이 차별을 만들어내기보다는 서로를 더욱 풍성하게 만들어갔었다.

우리가 차별하려는 입장에서 벗어나 평등의 입장이 되는 게 왜 어려운 것인지 모르겠다. 평등하게 대하면 나의 어떤 것을 빼앗긴다 생각하는 것인지 차별로 자신이 더 우위를 차지해 다른 사람을 자신보다 아래에 두는 것을 정의라고 생각한다. 차별적 시각은 과거에 머물러 있기를 원하지만 평등한 시각은 현재를 움직이고 새로운 미래를 만들어가는 지향점을 두고 있다고 본다.

왜냐하면 차별은 자신의 위치를 지키고 안주하려는 경향이 강하고, 평등은 서로를 있는 그 자체로 인정하기에 함께 살아가려 하고 미래를 구현해나가기 때문이다. 평등의 관계가 옳다고 모두 말하지만, 차별의 시각을 쉽게 자제하지 못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묻고 싶다. 평등하지 못하게 차별을 만들어내는 이유가 무엇이고 이 차별과 평등 사이에 어떤 인간의 내면 작용이 벌어지는 것일까?

성경은 시종일관 하느님과 인간, 그리고 하느님의 백성에게는 평등한 권리를 이야기하고 있다. 차별을 통한 착취와 폭력은 언제나 불공정한 사회를 만들기에 배타적 시각을 경고하기도 한다. 차별과 평등 사이에 도사리는 인간 내면의 작용은 바로 무관심이고, 소유에 대한 집착이며, 공동선을 파괴하는 이기심이다. 그리고 창피함을 잊은 끝없는 탐욕이며, 갈라치고 편을 나누어 등급을 매기는 철저한 탐욕적 경쟁, 폭력이 아닐까 생각해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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