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7> 석경당, 사타족 출신, 오대십국 시대 후진 건국
2019년 06월 25일(화) 04:50 가가
석경당(892~942)은 사타족 출신으로 오대십국 시대 후진을 건국한 인물이다. 산서성 태원의 사타족 출신으로 부친 석소용은 이극용을 정벌한 공으로 허베이성 명주자사로 임명되었다. 어린 시절 이사원에게 인정받아 그의 사위가 되었다. 부친이 석씨 성을 쓰게 된 유래는 분명치 않다. 926년 위주 방위를 맡았고 장인과 함께 후당의 장종을 토벌하는 반군에 가담했다. 이사원이 명종으로 즉위하자 보의, 선무, 하동절도사를 역임하였다. 명종이 죽자 933년 삼남인 이종후가 민제로 즉위했다. 그러나 934년 봉상절도사 이종가에게 목숨을 잃었다. 말제 이종가는 낙양에 입성해 군대에 하사할 은상을 확보하기 위해 가렴주구를 일삼았다. 당연히 민심이 싸늘해졌다.
말제가 두려워한 것은 석경당이었다. 그를 태평절도사로 옮기기로 하였다. 근거지인 태원에서 떼어놓기 위한 계략이었다. 석경당은 참모들과 향후 대책을 논의하였다. 그는 말하기를 “주상께서 죽을 때까지 태원에서 옮기지 않도록 약조하였는데 지금 갑자기 이런 명령을 내렸다. 내가 난을 일으키지 않으면 조정에서 출병할 것이니, 어찌 속수무책으로 길에서 죽겠는가?” 장서기 상유한이 거란족에게 원군을 요청할 것을 건의했다. 그는 말하기를 “거란이 가까이 운주와 응주에 있으니 정성을 들이고 절의를 굽혀 섬기십시오. 만일 위급한 일이 있으면, 아침에 부르면 저녁에 올 것이니, 어찌 성공할 것을 근심하십니까?” 석경당은 지원의 대가로 거란의 수장을 부친으로 자신을 신으로 칭하겠다고 약조했다. 노룡 1개 도와 안문관 이북의 여러 지방을 할양하겠다는 내용도 포함했다. 거란은 크게 기뻐하며 조만간 달려가 구원하겠다고 허락했다. 거란은 5만군을 남하시켜 진양을 공격하고 낙양으로 쳐들어갔다. 후당의 말제는 현무루에 올라가 불에 타죽었다. 황후와 황태후도 뒤따랐다.
936년 석경당은 후진을 건국하고 다음해 도읍을 낙양에서 개봉으로 옮겼다. 거란은 석경당에게 “너의 기운과 풍모, 견식과 도량을 보니 참으로 중원의 주인이다. 너를 천자로 세우고자 한다”고 권해 황제로 즉위시켰다. 약체 정권의 한계로 매년 30만 필의 비단을 국호를 요로 바꾼 거란에 바쳤다. 연운 16주도 요나라에 할양했다. 현재의 베이징 주변의 영토를 넘긴 것이다. 상유한은 황제에게 ”정성을 들이고 번진을 달래며 거란을 받들고, 병졸을 훈련시키고, 농업과 양잠을 힘써서 창고를 충실히 하며 상거래를 촉진해 재물을 풍족하게 할 것“을 건의했다. 왕조가 조금씩 안정을 찾았다. 도읍을 개봉으로 천도한 것도 상유한의 의견을 따른 것이다. 북쪽으로는 연과 통하고 남쪽으로는 장강과 회수와 통하므로 물자가 풍부하다는 이유였다.
여러 신하들이 출병해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군대에서 자랐다. 전쟁에서 백성이 겪은 피해는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정도다. 저들의 백성이 편안하면, 우리 백성 또한 편안할 것이니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요나라에 대한 외교를 놓고 조정이 갈렸다. 성덕절도사 안중영은 오랑캐에게 아첨하는 것을 배척하는 내용의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상유한은 비밀 상소에서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고, 백성에게 여력이 생기기를 기다린 연후에, 틈을 살펴서 움직인다면, 반드시 뜻을 이룰 것입니다.” 황제는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942년 석경당이 죽었다. 풍도와 경연광이 논의해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장자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아들 석중예 대신 제왕 석중귀가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경연광이 권력을 잡았다. 그는 대요 강경론을 주장했다. 요에 보낸 서한에서 신이라 칭하지 않았다. 요는 이를 비난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강온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이송은 “몸을 굽히는 것은 사직을 위함이다. 무슨 치욕이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946년 요는 남하해 국도 개봉을 함락시켰다. 요의 황제 야율덕광은 석중귀를 포로로 삼고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건국 11년만에 후진은 멸망했다.
여러 신하들이 출병해 북방의 옛 강토를 회복해야 한다고 건의했다. 그는 말하기를 “나는 어려서부터 군대에서 자랐다. 전쟁에서 백성이 겪은 피해는 차마 말로 하지 못할 정도다. 저들의 백성이 편안하면, 우리 백성 또한 편안할 것이니 무엇을 마다하겠는가?” 요나라에 대한 외교를 놓고 조정이 갈렸다. 성덕절도사 안중영은 오랑캐에게 아첨하는 것을 배척하는 내용의 강경한 상소를 올렸다. 상유한은 비밀 상소에서 말하기를 “폐하께서는 군사를 기르고, 백성을 쉬게 하고, 나라 안에 걱정이 없고, 백성에게 여력이 생기기를 기다린 연후에, 틈을 살펴서 움직인다면, 반드시 뜻을 이룰 것입니다.” 황제는 신중하게 움직이지 않았다.
942년 석경당이 죽었다. 풍도와 경연광이 논의해 국가에 어려움이 많으니 마땅히 장자를 세울 것을 주장했다. 아들 석중예 대신 제왕 석중귀가 제위에 올랐다. 이로써 경연광이 권력을 잡았다. 그는 대요 강경론을 주장했다. 요에 보낸 서한에서 신이라 칭하지 않았다. 요는 이를 비난하는 서한을 보내왔다. 강온론이 대립하는 가운데 이송은 “몸을 굽히는 것은 사직을 위함이다. 무슨 치욕이 있겠는가.”라고 주장했다. 946년 요는 남하해 국도 개봉을 함락시켰다. 요의 황제 야율덕광은 석중귀를 포로로 삼고 각지에서 약탈을 자행했다. 건국 11년만에 후진은 멸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