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현 광주 증심사 주지] 지금 이 순간
2019년 06월 14일(금) 04:50 가가
아침 일찍부터 처사님이 송풍기로 경내를 청소하고 있다. 며칠 동안 마른 태풍이라도 온 것처럼 바람이 몹시 거세게 불어서, 길가 나무에서 꽃이 무척 많이 떨어져 있었다. 송풍기가 한번 휘익 하고 지나가니, 삭발이라도 한 듯 자국이 선명하다. 문득 오래 전, 일본에서의 기억이 떠오른다. 교토의 한 절에 갔었는데 관리하는 분이 역시 송풍기로 경내의 길을 청소하고 있었다. 몇 년 뒤 홋카이도의 비야호를 갔을 때에도 같은 모습을 볼 수 있었다. 이번엔 직원이 아니라 자원봉사자처럼 보이는 나이 든 분 몇 분이 역시 송풍기로 호수가 산책길의 돌 틈새를 일일이 불어 내고 있었다. 두 곳 다 내가 보기엔 청소할 필요가 전혀 없을 정도로 깨끗한 돌길이었다.
일본이란 나라 전체가 결벽증에라도 걸린 듯한 느낌을 받는 것은 비단 나만은 아닐 것이다. 그동안 강한 집단주의 의식이 낳은 부작용, 그러니까 타인의 시선에 유독 예민한 일본인의 정서 때문이리라 생각했다. 그러나 오늘 우리 절에서 송풍기로 청소하는 모습을 물끄러미 지켜보다가 어째서 일본인들은 그토록 결벽에 가까울 정도로 거리 청소에 집착하는지 의문이 들었다. 그러다가 지진이 잦은 일본 특유의 환경과도 무관하진 않을 것 같다는 생각이 얼핏 들었다.
아무리 아끼고 애지중지해도 지진이 나면 모든 것이 허물어진다. 우리들에게 조선인 학살로 유명한 관동 대지진으로 도쿄가 완전히 페허가 되었을 때, 일본인들 사이에서 이제 도쿄는 영영 회생 불가능할 거라는 생각이 파다했다고 한다. 그러나 도쿄는 몇 년 사이에 금새 옛날의 모습을 되찾았다. 일본인들은 지진으로 폐허가 된 삶의 터전을 예전의 모습으로 되살리는 노력을 숱하게 반복해왔다. 언젠간 다시 폐허가 되어 버릴 것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토록 열심히 다시 복구하곤 한다.
일본어에는 영영 이별할 때만 사용하는 작별 인사가 따로 있다. 우리가 잘 아는 ‘사요나라’가 바로 그것이다. 일본인들의 정서 속에 영원한 이별은 지극히 예외적인 상황이 아니라, 일상에서 충분히 접할 수 있는 상황이다. 그래서 영원한 작별을 위한 인사말이 따로 있는 것이리라.
언젠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드시 사라질 것을 안다면,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음을 안다면 지금의 이 모습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간절한 만큼 아끼고 소중히 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간절함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이유를 따질 필요없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 같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환경 미화에 대한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반드시 사라질 것임을 안다는 것, 즉 무상(無常)에 대한 자각이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서 지나친 결벽증으로 발현된 것이다.
만약 내가 뭔가를 무척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이 언젠가 반드시 사라질 것임을 나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나의 아둔한 머리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가족, 연인, 명예, 권력, 재산, 사상, 아니면 젊음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좋게 말해서 내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노골적으로 말해서 집착하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집착이라고 써놓고 사랑이라고 읽는다. 사랑하니까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만큼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며,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든 단어도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말하고자 할 때 특별히 ‘자비’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으로 착각하는 그것은 ‘집착’이라고 말한다. 집착은 내가 사라질까 불안해하는 마음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확장하려는 욕망이다.
우리라고 일본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일본은 지진 같은 무자비한 자연환경 때문에 우리보다 조금 더 유난스러울 뿐이다. 미세 먼지도 모자라 초미세 먼지까지 등장해서 우리들의 일상 구석구석에 소리도 없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요즘, 그래도 미세 먼지는 뉴스에서 예보라도 하지만 집착은 아무런 예보도 없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집착은 미세 먼지보다 은밀하고 교묘하게 우리들의 일상에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러니 일본인들의 청결함을 부러워하기 보다, 오히려 그들의 청결함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안의 집착을 청소하는 것은 어떨까.
언젠가 인간의 의지와 무관하게 반드시 사라질 것을 안다면, 그래서 다시는 볼 수 없음을 안다면 지금의 이 모습은 간절할 수밖에 없다. 간절한 만큼 아끼고 소중히 할 수밖에 없다. 이런 간절함이 오랜 세월을 거치며 이유를 따질 필요없이 응당 그래야 하는 것으로 일본인들의 마음 속에 새겨진 것 같다. 그래서 일본인들의 환경 미화에 대한 결벽증에 가까운 집착이 나오지 않았을까 싶다. 반드시 사라질 것임을 안다는 것, 즉 무상(無常)에 대한 자각이 집단적인 무의식 속에 각인되어서 지나친 결벽증으로 발현된 것이다.
만약 내가 뭔가를 무척 소중히 여긴다면, 그것이 언젠가 반드시 사라질 것임을 나의 무의식은 이미 알고 있다. 다만 나의 아둔한 머리가 애써 알려고 하지 않을 뿐이다. 그것은 가족, 연인, 명예, 권력, 재산, 사상, 아니면 젊음일 수도 있다. 그것들은 좋게 말해서 내가 아끼고 소중히 여기는 것, 노골적으로 말해서 집착하는 것이다.
너무도 많은 사람들이 집착이라고 써놓고 사랑이라고 읽는다. 사랑하니까 아끼고 소중히 여긴다고 말한다. 그러나 사랑만큼 애매모호하고 불확실하며, 뭐라고 딱 꼬집어 말하기 힘든 단어도 없다. 그래서 불교에서는 진정한 사랑을 말하고자 할 때 특별히 ‘자비’라는 표현을 쓴다. 그리고 대부분의 사람들이 사랑으로 착각하는 그것은 ‘집착’이라고 말한다. 집착은 내가 사라질까 불안해하는 마음이며, 그래서 끊임없이 나를 확장하려는 욕망이다.
우리라고 일본과 다를 것이 없다. 다만 일본은 지진 같은 무자비한 자연환경 때문에 우리보다 조금 더 유난스러울 뿐이다. 미세 먼지도 모자라 초미세 먼지까지 등장해서 우리들의 일상 구석구석에 소리도 없이 차곡차곡 쌓이고 있는 요즘, 그래도 미세 먼지는 뉴스에서 예보라도 하지만 집착은 아무런 예보도 없고 볼 수도 들을 수도 없다. 집착은 미세 먼지보다 은밀하고 교묘하게 우리들의 일상에 진하게 배어 있다. 그러니 일본인들의 청결함을 부러워하기 보다, 오히려 그들의 청결함을 반면교사 삼아 우리 안의 집착을 청소하는 것은 어떨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