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83> 신년축제 ‘비스카 자트라’ 120여 민족 공동체 의식 다지다
2019년 05월 30일(목) 00:00
10부 ‘네팔’ (4) 축제와 공동체
8일간 축제… 음식·꽃 바치며 새해 복 기원
5m 수레 끌어 30m 통나무 세우는 모습 장관
밧줄로 꼭대기 올라 나뭇가지 던져 악운 없애
농사철 비 기원… 우리 ‘고싸움놀이’와 흡사
먼 옛날 네팔의 도시 박타푸르(Bhaktapur)에 있었던 한 나라의 왕은 깊은 고민에 빠졌다. 무남독녀 외동딸인 공주때문이다. 빼어난 미모로 절세미녀라 불리던 공주는 단 하루도 남자와 잠자리를 하지 않고 넘어가는 날이 없었다.

왕의 근심은 딸의 음탕함 때문이 아니었다. 공주와 잠자리를 한 남자들 모두 다음날이면 목숨을 잃었다는 게 문제였다. 왕위를 물려줄 사위를 얻기는커녕 더 이상 나라에 남자가 남아나질 않을 정도였다.

온 나라가 걱정에 휩싸였다. 나라의 남자들이 죽어나가면서 농사를 짓기도 힘들어졌다. 그때 우연히 지나가던 한 남자가 백성들의 이야기를 듣게 된다.

이웃 나라의 왕자였던 그 남자는 “제가 오늘 밤 공주님의 침대에 오르겠다”고 말한다.

방중술에 일가견이 있었던 왕자는 공주와 뜨거운 하룻밤을 보낸다. 격렬한 잠자리를 끝낸 공주는 금새 깊은 잠에 빠졌다. 그 순간 공주의 몸에서 수마리의 뱀이 빠져나와 허연 이빨을 드러내며 왕자를 공격하기 시작했다. 경계를 늦추지 않고 있던 왕자는 자신의 칼을 빼어 들고 뱀의 머리를 하나 둘씩 쳐내기 시작했다.

아침 시체로 발견될 것이라 믿었던 왕자는 자신이 죽인 뱀의 머리를 들고 공주의 방을 나섰다. 이 이야기를 들은 왕과 백성들은 뛸 듯이 기뻐했다. 몸에 있던 사악한 뱀이 사라지자 음탕했던 공주도 이전 참한 모습으로 되돌아 왔다. 왕자는 공주와 결혼해 대를 이어 나라를 다스렸고, 백성들은 이날을 기념해 해마다 축제를 열고 있다.

네팔의 신년축제에서도 가장 성대한 축제로 평가 받는 박타푸르의 비스카 자트라(Biska Jatra)와 얽힌 이야기다. 비스카는 ‘세계의 깃발’이라는 뜻과 함께 네와리어로 ‘뱀을 죽인다’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

비스카 자트라는 무려 8일간 펼쳐진다. 무엇보다 수만명의 인파가 축제에 참가해 높이 5m가 넘는 대형수레를 끌고, 30m에 달하는 통나무를 세우는 모습은 가히 장관을 이룬다.

축제 기간 사람들은 시바신의 화신인 바이라브(Bhairav) 신상을 태운 거대한 나무 수레 라트(Rath)를 오로지 사람의 힘으로만 끈다. 더르바르(Durbar) 광장에서 박타푸르 광장까지 200여m의 내리막길을 수만명의 사람들이 힘을 모아 밧줄을 당기며 라트를 이동시킨다. 라트가 지나가는 동안 사람들은 각자 음식과 꽃, 향, 색료 등을 라트에 바치며 새해의 복을 기원한다.

라트가 광장에 도착하면 바닥에 눕혀놓은 30여m의 거대한 통나무를 세우기 시작한다. 통나무를 세우는 것은 라트를 끄는 것만큼이나 쉬운 일이 아니다. 참가한 사람들의 호흡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밧줄을 당기다 줄에 걸려 넘어지거나, 사람들에 치여 다치는 사고도 허다하다.

라트를 끌어 오는 데만 2시간이 걸린다. 여기에 통나무를 세우는 작업 역시 2시간을 훌쩍 뛰어넘는다. 오랜 시간 고된 작업에도 사람들은 힘겨운 내색 없이 그저 흥겹게 축제를 즐긴다.

여기서 더 장관은 통나무가 바로 세워지면 사람들은 밧줄을 타고 바닥부터 꼭대기까지 맨몸으로 오르기 시작한다는 것이다. 수많은 사람이 도전하지만 맨몸으로 30m 높이를 오르기는 쉽지 않다. 우여곡절 끝에 정상에 오른 영웅(?)은 통나무 끝에 매달아 놓은 나뭇가지들을 뜯어 사람들을 향해 던진다. 나뭇가지는 뱀을 의미하는 것으로 ‘뱀을 해친다’는 뜻도 있다. 왕자가 공주 몸속에 있던 뱀을 해치우듯 고행을 거쳐 악운을 무찌르는 설화를 표현하고 있다.

네팔에서 뱀은 비를 상징하는 동물이다. 네팔에서 신년은 우기가 시작되는, 즉 농사가 시작되는 시점이기도 하다. 뱀을 하늘을 향해 높이 세워 신에게 ‘이제 비를 뿌려줄 때가 됐다’는 걸 알려주는 행위라는 게 현지인들의 설명이다.

박타푸르에서 열리는 비스카 자트라 외에도 네팔에서는 끊임 없이 축제가 열린다. 각 마을과 120여 민족마다 신년 축제를 따로 열고 있으며, 힌두교와 불교 등 종교 축제도 수없이 많다. 여기에 가족과 교육, 농경 등과 연관된 축제도 빠짐 없이 열리고 있는 탓에 매일 축제가 벌어지고 있다.

각 민족들은 축제 참여를 위해 직장이나 학교를 쉬기도 한다. 그만큼 휴일이 많다. 또 옆 마을 축제에도 빠지지 않고 참석하는 게 예의다. 그들이 섭섭해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흔히 네팔을 ‘산의 나라’나 ‘신의 나라’라고 하지만 ‘축제의 나라’로 부르기도 한다.

네팔에서 축제가 많은 것은 소수민족마다 문화가 다르다는 점이 있지만 무엇보다 농업이 큰 영향을 미쳤다고 볼 수 있다.

농업을 생계로 살아가는 네팔에서는 우리가 ‘품앗이’와 ‘두레’ 등 전통을 가지고 있듯 이웃과 민족 간 단합과 화합이 필요했다. 농사철에 접어들면 마을 주민들은 서로의 농사일을 도우며 살아갈 수 밖에 없다.

손이 많이 가는 농사일은 혼자서 하기에는 버거웠다. 그런 탓에 이웃들끼리 서로의 농사일을 도우며 살아야 했고, 다른 민족과의 물물교환은 삶의 필수 요건이었다. 이처럼 농경 중심의 사회에서는 사람이 가장 중요한 자원이 아닐 수 없었다. 노동력을 의식한 사람과 사람과의 관계 역시 매우 중요하게 여겨진다.

비스카 자트라에서 보듯 참가자들이 힘을 합쳐 밧줄을 당겨 수레를 끌고 거대한 통나무를 세우는 것도 어쩌면 협동심과 공동체 의식을 강화하기 위한 행위일 지도 모른다. 농경문화를 가진 우리나라에서도 이런 모습은 쉽게 찾아볼 수 있다. 가까운 광주시 남구 칠석동의 ‘고싸움놀이’와도 그 모습이 흡사하다.

네팔의 축제 속에는 사람과의 관계가 고스란히 녹아있다. 120여개에 달하는 각기 다른 민족을 하나로 뭉쳐주고, 이웃들과의 깊은 유대감을 형성하기 위한 하나의 매개체 역할을 한 것이다. 농경사회에서 필수적인 공동체 의식을 강하게 다지기 위한 장치가 축제인 셈이다.

/네팔 박타푸르=박기웅 기자 pbox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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