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월의 진실을 찾아서] <3> 5월 27일 도청 작전 재구성
가슴에 ‘확인 사살’ … 얼굴엔 ‘살인 미소’
김희송 전남대 5·18연구소 연구교수
도청·YWCA 총상 위치 동일…교전 이후 확인 총격한 듯
STUN 수류탄·M203 유탄발사기 사용 신무기 성능 실험
2019년 05월 23일(목) 00:00

1980년 5월 27일 광주를 피로 물들이고 도청에 진압한 소준열(오른쪽) 전남북 계엄분소장이 활짝 웃으며 전남도청에서 나오는 모습. 소 사령관 옆 철모를 쓴 이는 전두환의 최측근으로 알려진 박준병 제 20사단장이다. /5·18기록관 영상 촬영 = 최현배 기자 choi@kwangju.co.kr

5월 27일은 5·18항쟁의 10일을 함축하고 있다. 5월 항쟁의 마지막 날이었다는 시간의 의미뿐만 아니라 죽음을 예견하면서 도청에 남은 시민들의 저항과 희생은 이후 5월 운동의 이정표가 되었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5월 27일 전개된 군 작전의 실체를 제대로 규명한 적은 없다. 항쟁의 마지막 날에 관한 의미부여에 앞서서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파악할 필요가 있다. 이에 먼저 기존 군의 주장과 시각을 살펴보고, 지금까지 공개되지 않았던 군 기록을 통하여 5월 27일 작전을 재구성해보고자 한다.

문서 1 충정작전 개요. 편의대 투입과 함께 가스탄 사용이 기록되어 있다. 모든 작전은 작전지도지침에 따라 시행되었으나 사격만큼은 지침대로 이루어지지 않았다.
◇기존의 주장과 시각: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불가피한 작전

신군부는 5월 27일 작전을 상무충정작전이라고 명명했다. 상무충정작전은 평화적인 사태 수습이 불가능한 상황에서 시민의 희생을 최소화하기 위한 작전이었다고 주장한다. 전두환은 회고록에서 시민들이 군의 진입을 희망했으며, 광주 시민을 상대로 한 작전인 만큼 희생자가 나면 그것은 전과가 아니라 피해가 된다는 것을 강조했다고 역설했다.

계엄군은 상무충정작전 지침에 따라 5월 27일 새벽 4시 도청 후문에 도착한 3공수여단 특공대원들이 뒷담을 넘어 작전을 개시했다. 문서 1의 작전요도와 같이 3공수여단 11대대의 1중대는 후문 뒷담, 2중대는 후문 측면, 3중대는 정문 측면, 11중대는 정문으로 진입했다. 무기고로 표기된 민원실 측면으로는 특공중대와 4중대가 투입되었다.

도청돌입 작전을 비롯하여 광주YWCA, 광주공원 등의 작전에서 시민 17명이 ‘사살’되고, 계엄군 3명이 사망했다. 군은 작전 직후 작성한 전투상보에서“평소 연마한 침투 기술과 사격술을 유감없이 발휘한 작전”으로 자평했다. 시민의 희생은 전과(戰果)로 기록되었다.

문서 2 도청 작전 요도. 3공수는 도청 후문 뒷담·후문 측면·정문 측면·정문·민원실을 통해 5개 중대를 투입했다.
◇5월 27일 작전의 성격과 의미: 검시조서가 말하는 진실

5월 27일 작전은 주도면밀하게 계획된 공격 작전이었다. 군이 지금까지 공개하지 않았던 문서 2의 충정작전 개요는 군 작전의 성격을 잘 드러내고 있다. 군은 5월 25일 최규하 대통령의 광주방문 조차도 작전 수행을 위한 분위기 조성용으로 활용했다. 또한 편의대를 투입한 선무작전으로 시민과 난동자를 분리했으며, 수습대책위원회의 자중지란을 유도했다. 이러한 여건 조성 이후 실시한 작전의 성격은 은밀한 침투를 통한 타격과 무장 난동자 소탕이었다.

문서 2에서 주목할 내용은 ‘작전 지도 지침’이다. 작전 지도 지침에는 “지하실 작전시 깨스탄 사용 무력화 후 공격, 사격은 가급적 하복부 지향, 작전은 불순분자 생포위주로 실시 불가시 무력화, 건물내부 TNT처리 및 사전 파악된 기관총 진지 제거”등이 명기되어 있다.

27일의 작전은 실제로 작전 지도 지침에 따라 실시되었다. 민원실의 TNT뇌관은 비밀리에 침투한 특수 부대원들이 미리 제거했다. 작전 시행에 앞서 시내 상황을 정찰하기 위해 투입된 편의대는 전일빌딩 옥상에 기관총 진지가 설치된 것으로 파악했다. 27일 도청작전을 전개하던 특공대는 정문 진입과정에서 전일빌딩 쪽으로부터 사격을 받고 있다고 보고했다. 따라서 군은 전일빌딩 옥상의 기관총 진지를 긴급하게 제거할 필요가 있었다. 전일빌딩 10층의 헬기사격 탄흔은 이 과정에서 생긴 것이라고 볼 수 있다.

모든 작전은 지도 지침에 따라 시행되었지만 사격만큼은 지침대로 이뤄지지 않았다. 계엄군의 사격은 시민의 하복부가 아닌 상반신에 집중되었다. 검시조서에 따르면 27일 사망자 대부분은 머리와 가슴 등 상반신에 가해진 총상으로 사망했다. 27일 도청에서 희생된 시민들의 상황은 지금까지 제대로 알려지지 않았다. 삶과 죽음의 경계가 찰나의 순간으로 결정되었던 그런 상황이었다고 알려졌기 때문에 미루어 짐작했을 뿐이다.

주검은 죽음의 진실을 담고 있다고 한다. 27일 사망자의 검시조서는 이들의 죽음이 작전과정에서의 불가피한 희생이 아닐 수도 있음을 시사하고 있다. 도청에서의 사망자 중에는 6명의 대학생이 있다. 사망 장소가 도청 구내로 기록된 대학생 4명의 경우 총상이 3곳으로 동일하다. 이들은 교전과정에서 우연의 일치로 3군데에 총상을 입고 사망했다기보다는, 교전 이후 확인사살의 과정을 거쳐서 최후를 맞이했다고 추정할 수 있다.

도청 인근인 광주YWCA에서 사살된 2명의 사인은‘안두부 관통 총상’으로 동일하다. 광주YWCA의 경우 치열한 교전 끝에 앵커를 걸고 2층 창문을 깨면서 특공대가 돌입하여 제압한 작전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사망자의 총상부위가 동일하다는 것은 무엇을 의미할까? 사망자들은 당시의 상황을 말할 수 없지만, 주검은 죽음에 다다르게 한 과정의 진실의 일단을 보여주고 있다. 상무충정작전 직후 도청을 찾아서 함박 웃음을 짓는 소준열 전교사 사령관의 모습에서 군 작전의 의미는 확인된다.

문서 3 전투상보. "도청 지하실을 진입하는 과정에서 특수탄을 이용 순간적으로 무력화 시켰다"고 기록해 신무기 STUN수류탄의 성능 실험을 자인하고 있다.
◇5월 27일 작전의 재구성: 전투상보에서 은폐된 진실

5월 27일 군의 작전은 잔혹했다. 심지어 신군부는 새로 도입한 무기의 성능을 시험하는 기회로 활용했다. 군은 27일 작전에서 1979년 신규 도입한 특수 수류탄 STUN수류탄을 최초로 사용했다. 걸프 전쟁이나 시리아 내전에서 미국과 러시아가 새로운 무기의 성능을 시험하고 그 우수성을 외부에 과시하는 것과 같이 광주에서 신군부는 새로운 무기의 성능을 시험했다.

군은 지금까지 STUN수류탄 사용을 부정해 왔다. 그러나 3공수여단 특공대 책임 장교의 1995년 검찰조서는 STUN수류탄 지급 사실을 보여준다. “26일 23:00경 특공조가 출발했는데 여단 작전참모가 헬기를 타고 와서 STUN수류탄을 전달했다. 당시 STUN은 순간 실명 수류탄으로서 국내에서는 처음 사용하는 것이니까, 사용 후 결과를 보고하라는 지시도 아울러 받았기 때문에 그대로 특공조에 지시했다”고 진술했다. 작전의 노출까지 무릅쓰고 헬기를 이용하여 긴급하게 STUN수류탄을 전달했지만 작전에서 실제 사용하지는 않았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군이 지금까지 은폐해왔던 ‘광주시 진입작전 상보’에는 STUN수류탄 사용내역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1980년 작성된 이후 군의 공식 기록에서 사라졌던 문서 3의 작전상보에는 “도청 지하실을 진압하는 과정에서 입구에서부터 폭도들의 저항을 받았으나 특수탄을 이용, 지하실에 있던 폭도를 순간적으로 무력화시켰다”고 기록하고 있다.

문서 4 1980년 11공수 전투상보. “중대장은 M203유탄을 YWCA2층 폭도 배치지점에 3발을 발사했다”고 기록했으나 1988년 국회 제출 땐 이러한 내용이 빠졌다.
군이 지금까지 일관되게 사용을 부정해 왔던 특수탄의 사용이 은폐된 군의 기록에서 확인된다. 그림 2의 작전 지도 지침에서 적시했듯이, 지하실 작전에서는 특수탄을 사용하여 무력화시킨 후 공격을 감행했다. STUN수류탄 사용 내용이 담긴 작전상보가 지금까지 군의 공식기록에서 은폐된 이유가 무엇인지 알 수 있는 대목이다.

군은 27일 작전에서 STUN수류탄뿐만 아니라 고폭탄 발사로 대량 살상반경을 갖는 유탄 발사기까지 사용했다. YWCA작전에서 11공수여단은 3발의 유탄을 발사했다. 문서 4와 같이 1980년 작성된 11공수여단의 전투상보에는“중대장은 M203유탄을 YWCA2층 폭도 배치지점에 3발을 발사했다”고 기록했다. 그러나 1988년 국회에 제출된 전투상보에서는 유탄발사에 관한 내용이 사라지고, “과감한 공격을 감행했다”는 내용으로 변경되어 있다.

시민을 상대로 한 작전에서 유탄 발사기를 사용했다는 사실이 알려질 경우 군 작전의 잔혹함에 대한 비난을 우려하여 관련 내용을 은폐한 것이다. YWCA작전에서 군은 유탄 발사뿐만 아니라 STUN수류탄 사용도 은폐했다. 1995년 검찰조사에서 YWCA작전에 참가했던 11공수 지대장은 STUN수류탄을 다수 사용했다고 진술했다. 진실이 이러함에도 불구하고 전두환과 신군부는 5월 27일의 잔혹한 살상 작전을 시민의 희생을 최소화한 작전으로 지금까지 은폐해 왔다. /hesal@hanmail.net

※다음 원고는 6월 20일자에 게재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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