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0년 지기’ 형(조선대)에게
채희종 사회부장
2018년 12월 05일(수) 00:00
형을 처음 알게 된 날을 지금도 생생히 기억합니다. 10년 전인 2009년 봄이 맞을 겁니다. 어찌 이전에 ‘조선대’(朝鮮大)라는 형의 이름 석 자를 몰랐을 것이며, 그 넓고 아름다운 캠퍼스를 한 번이라도 거닐어 본 적이 없었겠습니까. 하지만 동생이 대학 출입 기자라는 신분으로 만난 스무 살 연상의 형은 출생 사연부터 성장 과정이 워낙 남달라, 당시 크게 놀랐다는 사실을 이제서야 밝히오.

오랜 세월 같은 지역에 살면서도 형의 진면목을 몰랐고, 기자 생활을 10년이나 한 뒤에야 그것도 대학 담당 기자가 되고 나서야 형을 알게 된 것이 열없기까지 했소. 그전까지 내가 아는 형의 모습은 그저 우리 지역에서 가장 큰 사립대라는 것이었소. 거기에 박철웅 총장이라는 사람이 있었는데, 사학 비리에 맞선 학원 민주화운동으로 퇴출됐다는 정도가 내가 아는 전부였소.

처음에는 형 관련 기사를 쓰려니 막상 한 줄도 쓸 수가 없었소. 우선 대학 소유권에 대한 복잡한 관계를 쉽게 이해할 수 없었어요. 또 형의 처지가 스스로 대학을 관리·운영할 능력이 없어 정부가 관리자를 파견한, 이른바 임시이사(관선이사) 체제의 대학이었기 때문이지요. 당시 형처럼 사학 비리와 소유권 분쟁, 학원 민주화 투쟁 등이 혼재된 대학을 ‘분규 대학’이라 불렀고, 전국에는 이런 곳이 서너 군데가 있었지요.

담당 기자로서 저는 형의 출생부터 공부를 시작했습니다. 1946년 초대 광주시장이자 이듬해 전남 지사에 임명된 애국지사 서민호 선생이 대학 설립을 추켜든 것이 태동의 시작이지요. 그는 도내 유지, 기관장, 지식인들과 함께 민립 대학 설립을 위해 조선대설립동지회를 결성했어요. 심지어 대학 설립을 위한 회비와 기부금을 모으기 위해 매일 간부 회의를 할 정도로 열성이었다는 지역 원로들의 증언도 들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광복 직후 먹고 살기도 힘든 시절인 1946~1947년에 무려 7만여 지역민(설립동지회원)의 정성으로 형의 ‘출생 신고’(조선대 설립 인허가)가 이뤄졌죠.

일제 강점기인 1920년대 우국지사들의 민립 대학 설립 운동이 수차례 전개됐으나 총독부에 의해 모두 와해된 이후, 형은 광복과 함께 탄생한 한국 최초의 민립 대학이자 지방 최초 사학이라는 영광을 한 몸에 받고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대다수 지역민이 이 사실을 몰랐고, 심지어 조선대 교직원과 학생조차 제대로 아는 이가 많지 않았죠.

조선대의 분란은 민립 대학이 특정인의 소유가 되면서 시작됐다지요. 설립을 주도한 서민호 전남 지사 밑에서 주요 업무를 담당했던 당시 운수과장 박철웅 씨가 60년대를 거치면서 조선대를 사실상 사유화한 것이지요. 그러나 1988년 1월8일, 학내 민주화 운동으로 일컫는 1·8항쟁을 정점으로 대학 구성원들은 비리를 저지른 박철웅 씨 측 경영진을 축출합니다. 더불어 대법원에서 조선대는 특정인이나 특정 집단의 소유가 아닌 설립동지회, 즉 도민들의 힘으로 세워진 대학임을 인정받지요.

민립 대학임은 인정받았으나 경영 주체가 공백인 탓에 정부에서 임시이사를 파견했어요. 20여 년간을 분규 대학으로 낙인찍혔던 형이 대학 정상화에 전력할 때가 바로 우리가 만났던 시기지요. 이렇게 형을 만난 뒤, 2009년에 쓴 첫 번째 기사가 ‘조선대가 또 아프다’였소. 비리로 물러났던 옛 경영진이 교과부를 통해 이사진으로 복귀하려는 통에 대학 구성원들이 진통을 겪고 있다는 내용이었습니다. 이후 6개월의 임시이사 재파견을 거쳐, 분규 21년 만인 2009년 12월 형은 ‘대학 정상화’(정이사 파견)라는 기쁨을 맛보게 되지요.

이 과정에서 저는 토요일에도 대학 본부에 들를 정도로 거의 매일 취재를 했고, 교직원들과 함께 교과부로부터 정이사 파견을 얻어 내기 위한 아이디어도 주고받곤 했던 기억이 나네요. 형이 정상화됐을 때 저의 기사 한 줄이 교과부에 조금이라도 영향을 미쳤을 것이라는 생각에 얼마나 가슴 벅찼는지 모릅니다.

이후 업무가 바뀌어 다른 부서들을 돌아 10년 만인 지난 11월 다시 대학 출입 기자로서 형을 만나게 됐지요. 형은 한국 최초 민립 대학이자 지방 최초 사학이라는 위상은 고사하고, 어렵게 이뤄 낸 정이사 체제 대신 임시이사 체제 대학이라는 불명예를 뒤집어쓰고 있었습니다. 더욱이 교육부의 대학 평가에서 ‘자율개선대학’에 들지 못하는 수모를 당했고요.

지역민의 자랑이었던 형은 이제 학생과 학부모, 그리고 지역민에게 짐만 되는 존재가 됐습니다. 호남 거점 대학으로서의 당당한 풍채를 가졌던 형의 모습은 어디로 갔습니까? 이리저리 찢긴 채 갈 곳 몰라 헤매는 형을 보며 이 아우의 가슴은 미어집니다. 아직도 자신들의 입지와 학과·연줄만을 챙기는 이들을 보며, 아예 형을 잃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걱정마저 드는 것을 어찌할 수 없습니다. /chae@kwangju.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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