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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시 부르는 임을 위한 행진곡]1987년 여름, 타는 목마름으로 불렀던 “민주주의여 만세”
시인 김지하 유신독재에 저항
1970년대에 발표해 구전
1983년 노래로 만들어 전파
6월항쟁 때 넥타이 부대들
명동성당·향린교회 등에서
목 놓아 부른 노래
탄핵정국서 전국에 메아리

2018. 09.03. 00:00:00

한국 현대사에서 1987년은 수십 년간 지속된 군부독재에 균열을 낸, 국민들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안을 쟁취했던 의미 있는 해였다. 사진은 박종철 고문치사사건 은폐 조작 폭로 기자회견이 열렸던 민주화의 성지 명동 성당. <광주일보 자료사진>

2016년 민중총궐기 대규모 집회가 열린 11월 12일 오후 전국 각지에서 올라온 100만여명의 국민이 광화문 광장 일대에서 박근혜 대통령의 퇴진을 촉구하는 촛불시위를 벌이고 있다. 광화문, 경복궁을 넘어 암흑 속 청와대가 보인다.



광주 5·18 구묘역에 있는 이한열 열사 묘지에 영화 ‘1987’ 포스터가 놓여있다. 최루탄에 맞아 숨진 이한열 열사는 1987년 6월항쟁의 기폭제가 됐다.



김지하는 1969년 ‘황톳길’로 등단한 이후 유신 독재에 저항했던 민주화의 상징적 시인이었다. 풍자시 ‘오적(五賊)’으로 구속되는 필화를 겪었으며 1974년에는 민청학년 사건을 배후 조종한 혐의로 사형 선고를 받기도 했다. 선각자이자 민주주의를 위해 헌신했던 시대의 지식인이었다.
물론 그의 행보에 공(攻)만 있는 것은 아니다. 위대한 성자가 아닌 이상 누구에게나 과(過) 또한 존재한다. 지난 2012년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해 진보진영으로부터 비난을 받기도 했다. 그럼에도 우리의 전통 사상인 생명사상을 주창하고 많은 이들에게 생명의 존엄함을 설파했던 것은 선한 영향력으로 남아 있다.
그의 작품에서 빼놓은 수 없는 시가 바로 ‘타는 목마름’이다. 이 시는 그의 대표작을 넘어 저항시의 상징으로 각인됐다. ‘타는 목마름으로’에는 폭압의 현실을 고발하는, 민주주의를 열망하는 민중들의 간절함이 담긴 시다. 그러나 발표 당시인 1970년대에는 쉽게 접할 수 없었다. 그러는 중에 사람들의 입과 입을 통해 시는 많은 이들에게 읽혔고 낭송되었다. 대중들이 보다 작품을 쉽게 접할 수 있었던 것은 1982년 출간된 그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에 수록되면서였다.
그렇다면 ‘타는 목마름으로’는 어떻게 노래로 만들어졌을까. 언급한대로 문화운동을 하는 학생들에 의해 자연스럽게 노래로 발전되었다고 보는 것이 일반적이다.
“1983년 1월 연세대 후문 근처 봉은동의 한 자취방에서도 이 시는 낭송되었다. 연세대 동아리인 현대문화연구회 회원들이 모인 자리에서 한 회원이 이 시의 일부를 읊조렸다. 이를 들은 다른 이가 곡을 붙여 노래를 부르기 시작했고, 이렇게 얼기설기 만들어진 노래 가락을 이성현이 정리해 완성시켰다고 한다. 이 노래는 민중문화운동연합(민문연) 이름으로 노래모임 ‘새벽’이 녹음해 비합법적으로 민문연 5집 ‘민주주의여 만세’(1985)에 실려 발표되었다.” (정유하, 『그래도 우리는 노래한다』, 한울엠플러스, 2017)
이 노래를 부르고 있으면 언젠가는 민주주의가 실현될 것이라는 강력한 확신에 도달하게 된다. 가마솥 폭염 뒤에 선선한 가을이 오듯이, 끝나지 않을 것 같은 혹한이 어느 결에 물러나고 새봄이 오듯이, 그렇게 민주주의는 기어이 오고야 말리라는 절절함이 밀려온다.

내 머리는 너를 잊은지 오래
내 발길도 너를 잊은지 너무도 오래
오직 한가닥 타는 가슴속 목마름의 기억이
네 이름을 남몰래 쓴다
타는 목마름으로 타는 목마름으로
민주주의여 만세

‘타는 목마름으로’는 다분히 서정적이다. 서정은 서사를 끄는 힘이 있다. 달리 말해 감성적인 노래는 배면에 에너지를 응축하고 있어, 사람들의 마음을 집약한다.
광주에서의 ‘타는 목마름으로’는 1980년대 중반에 불렸다고 전해진다. 특히 해마다 5월이면 집회와 시위 현장 그리고 거리음악제에서 불렸다. 학생들은 술자리에 모이면 너나없이 시대의 울분을 토로하며 노래를 불렀다. 특히 ‘민주주의여 만세’라는 대목에서는 모두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한마음으로 감정을 쏟아냈다.
이 노래가 강렬한 힘을 발휘했던 때는 다름 아닌 1987년이었다. 한국 현대사에서 ‘1987년’은 수십 년간 지속된 군부독재에 균열을 낸, 다시 말해 국민들의 힘으로 직선제 개헌안을 쟁취했던 의미 있는 해다. 서울대생 박종철의 죽음, 광주 출신 이한열 열사의 죽음은 당시 민주주의를 열망하던 이들의 가슴에 강렬한 불길로 타올랐다.
잠시 1987년 6월의 어느 날로 되돌아가보자. 6월 10일, 신세계 앞 로터리와 퇴계로 그리고 명동에서는 학생과 시민들의 시위가 펼쳐지고 있었다. 이들은 인근 명동성당에 집결했고 성당 주변은 어느새 전경들에 의해 에워싸여졌다. 이들을 구출하기 위해 성당 밖에서는 격렬한 시위가 벌어졌고 6월 15일 오전 11시 해산하기까지 세계인들의 눈이 명동성당을 주시했다.
명동성당은 민주화의 성지였다. 가톨릭 첫 순교자인 김범우의 집터라는 ‘가톨릭 성지’의 상징을 넘어 ‘천주교정의구현전국사제단’이 결성(1974년)된 곳이기도 했다. 그리고 군부독재라는 현대사의 어두운 장막을 걷어내는 데 결정적 기여를 했던 기자회견이 열린 곳이었다. 1987년 5·18광주항쟁 추모미사에서 김승훈 신부는 박종철고문치사사건 은폐 조작을 폭로했다. 6월항쟁 ‘태풍의 눈’은 기어이 엄혹하고 가혹했던 현대사의 물줄기를 그렇게 바꿔놓았다.
명동성당과 함께 기억해야 하는 곳이 바로 성당에서 멀지 않은 향린교회다. ‘향기 나는 이웃이 되겠다’는 뜻이 깊고 아름답다. 당시 5월 27일 이곳에서 ‘민주헌법쟁취국민운동’ 본부가 결성됐는데 명동성당이나 기독교회관이 봉쇄된 상태에서 계훈제, 박형규 등 각계 150여 명 인사들이 모여 감행했다. 이곳 정문 기둥에는 ‘6월민주항쟁 기념비’가 있어 당시의 시대상을 증언한다.
6월 항쟁은 ‘넥타이부대’로 일컫는 다수의 시민들과 직장인들이 함께 했다는 데 역사적 의의가 있다. 이들이 목 놓아 불렀던 ‘타는 목마름으로’는 서로를 하나로 묶어준 시대의 노래인 셈이었다. 그리고 지난 2016년 탄핵정국과 맞물리면서, 노래는 전국 방방곡곡으로 메아리쳤고 ‘거짓과 위선, 기만으로 쌓아올린’ 정권을 무너뜨렸다.
그러나, 민주주의가 많이 진척되었다고 하지만 미진한 부분은 여전히 남아 있다. 비단 정치적인 민주화뿐 아니라 삶의 다양한 부분에서의 민주주의는 아직 진행 중이다. 생활의 민주주의, 제도의 민주주의 등 열어나가야 할 ‘민주주의 문’은 적지 않다. 이 노래가 시대를 넘어 아직도 유효한 것은 그 때문이다.
또 하나, ‘민주주의여 만세!’라고 온 몸을 다해 목청껏 불렸던 것처럼 누군가에게는 그렇게 ‘만세!’라고 부르고 싶은 그 무엇이 있을 것이다. 개인의 소원을 넘어 공동체적인 화두일 수도 있다. 6월 항쟁을 승리로 견인했던 노래가 아직도 우리들의 가슴 속에서 활화산처럼 타고 있는 것은 그 때문이다.
/서울=박성천기자skypark@kwangju.co.kr

※이 기사는 지역신문발전기금 지원을 받았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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