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라도 들여다보기] 충무공 이순신과 고하도 - 김형주
2017년 06월 06일(화) 00:00
충무공의 혼이 서린 목포항 남쪽의 고하도(高下島)는 유달산이라는 높은 산 밑에 있는 섬이라 하여 이렇게 이름이 붙여졌으며, 고하도(孤霞島), 고화도(高和島), 보화도(寶和島), 비하도(悲霞島) 등으로도 불렸다.

목포 사람들은 흔히 고하도를 ‘용섬’이라 하였는데, 산의 형상이 기복을 반복하면서 용머리 부분이 굵게 변해 그렇게 부른 것이다. 예전엔 바다로 둘러싸여 배를 통해서 갈 수밖에 없었지만 지금은 육로를 통해 쉽게 건너갈 수 있으며, 고하도 남쪽의 장구도와 허사도를 통합하여 하나의 섬으로 형성하였다.

고하도는 목포 북항과 2012년 6월 29일 개통된 목포대교를 통해 연결되고 있다. 목포의 새로운 명물로 등장한 목포대교는 두 마리 학이 마음껏 멋을 내면서 날갯짓을 하는 형상이다.

고하도 이충무공 유적은 이순신 장군이 1597∼1598년 사이 108일 간 머물면서 군수물자 확보와 병력충원, 군선(軍船)의 건조 등 수군을 재정비했던 곳으로 1974년 전남 기념물 제10호로 지정되었다. 명량대첩 후에 군산 앞바다의 고군산도까지 올라갔다가 다시 내려와 1597년(선조 30) 10월 29일에 이곳 고하도로 진을 옮겼다.

조선시대에는 나주목(羅州牧)에 속한 고하도는 기념비문에는 고화도, ‘난중일기’(亂中日記)에는 보화도로 표기하고 있다. 서남해안의 바닷길과 영산강의 내륙 수로가 연결되는 지점으로 전략적 요지이다. 군진의 본부가 고금도진으로 옮겨간 이후 고하도진에는 별장(別將)이 배치되었다가, 1647년 고하도진이 당곶(唐串, 목포시 하당 일대)으로 옮겨 감에 따라 폐지되었다.

이충무공기념비는 1597년 정유재란 이순신 장군이 군량미를 보관하기 위해 당시 고하도에 시설을 갖추고 관리하게 했던 행적을 기념하기 위해 건립된 것이다. 기념비의 건립은 1722년 통제사로 부임한 오중주(吳重周)와 이순신의 5대손 이봉상(李鳳祥)이 세웠다. 전남 유형문화재 제39호로 고하도 유적지 안에 함께 있다.

비의 명칭은 ‘유명조선국 고삼도통제사 증좌의정충무이공 고하도유허기사비’(有明朝鮮國 故三道統制使贈左議政忠武李公 高下島遺墟記事碑)로 숙종 때에 재상을 지낸 남구만(南九萬)이 비문을 지었으며 조태구가 글씨를 썼다. 비는 모충각(慕忠閣) 안에 있고 42개의 현판이 걸려 있다. 일제강점기에 야산에 방치되어 있었던 비석은 광복이 되면서 현 위치에 세웠다. 1949년에 비각을 건립하였고 1973년 중수하였다.

또한 고하도는 1904년 일제에 의하여 육지면을 최초로 시험 재배하여 성공한 곳으로 잘 알려져 있다. 육지면은 재래종 면화에 비하여 순백에 올이 길고 섬유가 잘 꼬여 방적용 재료로 알맞으며 수확량도 높은 미국산 ‘킹스임프르브드’(King’s Improved)라는 종자였다.

이후 육지면은 전남 등 남부지방을 중심으로 보급이 확산됐고, 이렇게 생산된 질 좋은 목화솜은 광주, 군산, 인천 등지 방직공장을 거쳐 고급면직물로 탈바꿈하였다.

영산강 하구에 위치하는 고하도는 전근대의 시기에는 군사방어의 요충지 역할을 하였으며, 근대 이후에는 천혜의 관광휴양지로서 중요성을 더하고 있는 보배로운 땅이라 하지 않을 수 없다.

〈광주시립민속박물관 학예실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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