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독 50년 호남출신 간호사 인생스토리-박애자씨] 백인 우월주의 맞선 ‘파독 간호사 1호’
2016년 03월 03일(목) 00:00

박애자씨 등 파독 간호사들이 5월 1일 독일 노동절 행사에 참여해 거리 행진을 하고 있는 모습.

‘사람은 누구나 몇 개의 상처를 몸에 새기지. 그 상처가 조금씩 아물 때쯤이면 어느새 생의 종착역에 다다르곤 하지.’ 애자 씨를 처음 만난 건 쓰디 쓴 에스프레소조차 달콤한, 베를린의 오래된 카페에서였다. 그 향이 그녀의 불행한 날의 기억을 잊게 하는 듯했다. 두 번째 그녀를 다시 만났을 때는 두툼한 사진첩과 함께였다. 세월의 퇴적층이 쌓여 있는 오래된 앨범 속에는, 웃음으로 가장한 삶의 고뇌와 먼저 간 이들과의 추억이 있었다.“덕분에 오랜만에 옛날 사진 보았네. 먼저 간 동생 편지를 보다가 눈물이 나더라고. 이제는 나도 삶을 정리할 때가 되었어.” 손가락을 짚어 하나하나 사진 속 과거를 더듬는 그녀는, 이미 50년 전으로 시간 여행을 떠나고 있었다.



그녀는 1966년, 처음 독일에 간 파독 간호사 1호다. 광주 서구 양림동이 고향인 박애자 씨(71세). 왜 고향을 떠나왔을까? 대뜸 아버지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다 울컥해진다.

“아버지가 학교 선생님이었는데 집은 가난했어. 월급 받으면 작은집 땅을 사주고 그랬어. 당신 자식들은 안중에도 없었지. 우리집은 명절에도 좋은 음식을 먹은 적이 없어.”

박 씨의 어머니는 외국물 먹은, 그야말로 틘 사람이었다. 일제강점기 시절, 만주에서 생필품 배달사업을 하는 외삼촌 집에서 일을 했다. 아버지와 결혼해서 일본에서 살다가 해방이 되자, 고향인 광주로 왔다. 아버지는 일본에서의 교편생활이 인정되어 고향에서 쉽게 선생자리를 얻을 수 있었다. 평범해 보이는 가정이지만, 어린 시절을 생각하면 행복한 기억이 없다.

“아버지를 생각하면 사실 지금도 무섭고 떨려. 자식에 대해 털 끝 만큼도 정이 없는 양반이셨지.”

아버지에 대한 기억이 꾸역꾸역 몰려왔다. 애자 씨의 눈에 물기가 스며들었다. 4녀 2남으로 장녀인 애자는 1945년생이다. 해방둥이는 격동기 시대를 어머니의 태반에서부터 겪어서인지 감성이 예민하고 성격 또한 급하다는 말이 있다. 근거 없는 소리도 아니다. 애자는 어릴 때부터 아들 우월주의가 싫었다. 할머니 조차 딸 손주는 ‘개손주’라고 할 정도로 아들아들, 했다.

“어머니가 몸이 약하고 늘 아픈데도 그 몸을 이끌고 일하고 밥하고, 딸들도 허드렛일을 다 했지. 내가 화가 나서 아버지에게 ‘남자가 밥 하면 안되냐’고 막 따졌어.”

아버지가 집에 있을 때는 조용한 적이 없었다. 언제나 시끄럽고 큰 소리가 났다. 애자는 무조건 집을 떠나고 싶었다. 그때 그녀의 눈에 띈 파독 간호사 모집광고는 애자에게 딱 운명의 부름이었다. 시험을 보고 합격을 했지만 막상 서울 가는 차비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차비 좀 달라고 했더니, ‘돈 없어!’ 하시는 거야. 그래서 내가 나중에 나 시집 보낼 일 없을 테니까 돈 좀 달라 했지. 그랬더니 아버지가 돈을 방바닥에 확 뿌리시더라고.”

그녀는 말 그대로 그때 피눈물이 났다고 했다. 따스한 말 한 마디는 커녕 차비도 아까워하는 아버지가 그렇게 미울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이 들었는지 아버지가 김포공항까지 배웅을 나오셨더라고. 그러면서 ‘월급 받으면 아껴 써서 반은 쓰고 반은 집으로 보내라’고 하시더라고.”

애자는 그때 이별이 힘들어서기보다 서러워서 울었다. 떠나는 딸에게 돈만 보내라고 하는 말이 그렇게 야속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애자는 효녀였다. 용돈 몇 마르크만 남겨놓고 전부 한국으로 송금했다. 남들은 3년이 지나니 한국을 방문하곤 했다. 하지만 애자는 갈 수가 없었다. 아버지에게 가고 싶다고 하니 ‘비행기 값 아까우니 그 돈을 보내라’고 했다. 결국 독일 온 지 11년만인 1977년에야 처음으로 한국 땅을 밟았다.

“막상 한국에 갔는데 아버지가 ‘뭐하러 나왔냐?’고 하시는 거야. 얼마나 눈물이 나던지 다시는 오지 않겠다고 다짐까지 했었어.”

집을 떠난 것은 좋았지만, 독일도 호락호락하지 않았다. 가장 힘들었던 건 먹는 것과 언어였다. 아침저녁으로 빵을 먹는 병원음식이 도통 맞지 않았다. 간호 보조원으로 독일에 왔기 때문에 의학용어도 익숙하지 않았다. 애자는 늘 사전을 주머니에 넣고 다녔다. 누가 말하면 한국말로 받아 적고 찾아보면서 일에 익숙해져갔다.

“언어가 안되니까 항상 싱글벙글하며 멍청하게 하라는 대로 다 했어. 그야말로 복종이었지.”

병원에서 인정받으려고 더 많은 일을 했다. 3교대 하면서 밤근무 할 사람이 없으면 애자가 지원했다. 하지만 병원일이 익숙해지면서 부당한 면이 보이기 시작했다.

한 번은 같은 병원에서 일하던 독일의사와 간호사들이 같은 병원 한국인 간호사를 해고시키려고 서명을 한 적이 있다. 그때 애자는 서명을 받으러 온 독일 의사에게 말했다.

“이 기회에 독일 간호사 한 명도 이상한 듯 한데, 그 사람 내보내는 서명도 받자고 했어. 그리고 ‘의사인 당신이 누구하고만 일하겠다고 사람을 고르는데, 우리도 어느 의사하고만 일하고 싶다고 이야기 하면 좋겠어?’라고 따졌지.”

그때부터 독일 동료들이 애자만 나타나면 말하다가도 조용해지거나 은근히 따돌리기도 했다. 환자와의 관계에서도 힘든 일이 많았다. 한 번은 독일인 환자가 애자가 외국인 간호사라고 자신의 몸에 손도 못 대게 하는 것이다. 그때마다 애자는 가슴 한 구석이 통증으로 울렁거렸다.

“독일에는 간호사들이 음식을 병실에 넣어주는데, 한 번은 어떤 환자가 좋은 소시지는 내가 먹고 자기는 나쁜 것을 준다고 안 먹겠다며 던지는 거야.”

억울하고 속상해서 환자들과 한바탕 싸우고는 기숙사에 와서 펑펑 울었다.

애자는 외과 중환자실과 대학병원 수술실에 일했다. 그러다 허리 디스크를 얻었다. 설상가상으로 일하다 넘어져서 허리에 마비까지 왔다. 결국 2000년에 조기 퇴직을 할 수밖에 없었다.

애자는 결혼에 대한 환상이 없었다. 당시 주위 한국 간호사들은 독일인들과 결혼한 사례가 많았다.

“심지어 독일 간호사들이 ‘한국 간호사들이 우리 독일남자들 다 뺏어갔다’고 할 정도였다니까. 그래서 내가 그랬지. ‘그럼 너희들도 한국 남자들 뺏어가면 될 거 아니야!’라고 말이지.”

퇴직을 한 후, 몸 이곳저곳이 아프기 시작했다. 요즘에는 주로 병원에 가는 일이 일상일 정도다. 나이가 들수록 고향생각이 간절해졌다.

2010년 아버지가 치매에 걸려 양로원에 들어갔다는 소식을 듣고 한국을 방문했다. 자식들도 못 알아본다는 아버지가, 큰 딸 애자는 금방 알아보았다. 10여 년만에 만난 딸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나에게 ‘혼자서 독일 땅에서 고생한다. 이제 한국에서 아버지랑 살자!’ 였어…….” 애자는 이 대목에서 말을 잇지 못했다. 처음으로 아버지의 따스한 말을 들었다. 어쩌면 오랜 동안 아버지가 가슴 한 켠에 담아왔던 진심의 언어였을지도 모른다. 독일로 돌아오는 비행기에서 애자는 하염없이 눈물을 흘렸다. 3일 후 아버지의 소천 소식이 들렸다.

사랑이 지나간 자리에 적막감이 스멀거렸다.

/박경란 재독 칼럼니스트 kyou723@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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